319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13일)

1.
오늘 아침은 시부터 한 편 읽는다. 내란성 불면증을 앓고 있다. '만약 계엄이 성공했다면'. 만약 헌재에서 기각된다면' 등등의 악몽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그래 마음을 비우는, 장자식 "심재"를 소환했다.
만약이라는 약/오은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더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 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2.
오늘의 화두는 '심재(心齋)하라'이다. <<장자>>의 <인간세>에 나오는 것이다. 제자 안회가 스승인 공자를 찾아와 난폭한 정치때문에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위나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그러자 공자가 말한다. "너는 거기에 가 봤지 처벌이나 받고 말 거다. 원래 그런 일을 할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먼저 도(道)를 갖추고 나서 남도 갖추게 한다. 너는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하여 아직 불안정한데, 어찌 가능 하겠느냐?"
그러자 안회는 자신이 그 일을 하려고 얼마나 높은 경지까지 수양을 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 하며 스승을 설득하려 애쓴다. 그러자 스승이 한 마디 한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있겠느냐? 너는 아직도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 여기서 나는 '감화(感化)'라는 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이 하는 정의로운 활동은 대개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또 다른 정의로운 사람과의 충돌일 뿐이다. 그러니 충돌만 존재하고 감화력은 생기지 않는다. 어쨌든 안회는 갈수록 더 이해가 안 되었다. 결국 자신은 도저히 어찌해야 가능한지를 알 수 없으니 방법을 알려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스승이 말한다. "심재(心齋) 하라!"
'심재 하라'는 말은 '마음을 재계하라'는 뜻이다. "자기 마음에 출입문을 세우지 말고, 보루도 쌓지 말며, 오직 자신 본바탕의 음성을 듣도록 자신을 준비시키라"는 말이다. 심재의 '재'자는 '재계(齋戒)'이다. 재계는 종교 의식 따위를 치르기 위해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심재는 정신을 청청하게 가다듬는 것을 말한다. '심재'의 적합한 번역은 '마음을 굶기다'로 나는 본다. 그냥 비우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절대 필요한 이야기 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다.
3.
이는 제2편 <재물론>에서 말한 '오상아(吾喪我)' 그리고 제6편 <대종사>에 나오는 '좌망(坐忘, 앉아서 잊어버림)'과 함께 <<장자>>의 중요한 사상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다 같이 우리의 욕심, 분별심, 이분법적 의식(意識), 일상적 의식, 자기 중심 의식인 보통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이를 추월하는 초이분법적 의식, 빈 마음, 새로운 마음을 갖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안회는 자기가 '인의(仁義)'를 갖추었기에, 요즈음 말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에, 겉으로나마 굽실거려야 할 때는 굽힐 줄 아는 타협심과 유연성도 있고, 필요할 때엔 옛말이나 고사(古事)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용해 쓸 수 있을 만큼 고전에 박식하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나니 더 이상 뭐가 모자라는지 자기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런 도덕성, 참신성, 진취성, 두뇌, 학연, 건강, 젊음 등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도 아직 모자라다니, 제발 무엇이 모자라는지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에 공자는 한마디로 '재(齋)하라'고 한다. '재'란 말은 '굶다'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비우는 것이 아니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목욕재계(沐浴齋戒)라 할 때처럼 의식으로 하는 재는 물론 술이나 고기, 파, 마늘 등 자극성 음식을 피하는 것이다.
안회는 그런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자기는 본래 가난해서 굶기를 밥 먹듯 하나 굶는 것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라면 자기보다 나은 적격자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가 말하는 '재계'란 그런 육체적인, 혹은 의식(儀式)적인 제계가 아니라, 바로 '마음의 재(心齋)'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재(齋)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계(齋戒)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심재'의 적합한 번역은 '마음을 굶기다'이다. 그냥 비우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이다.
4.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공유한다. '참 사람'은 오리무중 속에서 '홀로' 조화로운 소리를 듣는다. 성공한 사람에게 큰 적은 성공 '기억'이다. 혁명가에게는 혁명의 '기억'이 큰 적이다.
'기억'에 갇힌 그 사람은 새롭게 펼쳐지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방법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에 갇힌 그 사람은 역사의 흐름에 맞는 새롭고도 적절한 시대정신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에 주도권을 빼앗긴 사람은 온전한 그 '사람'이 아니다. 혁명 깃발을 '완장'으로 쓰다가 결국 '반항아'로 전락해 버린다.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기억'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 한나라를 개국한 유방은 유학자들을 무시했다. 맨날 탁상공론만 한다고. 그런데 육가라는 유학자는 유방에게 <<시경>>이나 <<서경>>을 읽으라고 계속 권했다. 그러자, 유방은 "나는 말 잔등에 올라탄 채 천하를 얻었다. 뭐가 부족해서 내가 <<시경>>이니 <<서경>> 하는 따위를 들어야 하나?"고 말했다. 그러자 육가는 "폐하는 말 등에서 천하를 얻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말 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경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입니까?"고 일갈했단다. 사마천은 유방의 이 말에 "언찮아하면서도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전한다.
내 눈길이 가는 단어가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라는 말이다. 유방의 업적은 '부끄러운 기색'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방은 승리의 기억에 갇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라는 지위가 주는 거만한 관념에 갇히지도 않고, 오로지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기색'을 가질 수 있었다. 유방은 배운 것도 없고, 인격적 품위도 없었지만, 계속 '사람'으로 서의 내면을 잃지 않고 유지하였던 것이다. 유방은 육가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어 혁명 기억에 갇혀가는 자기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바로 새로운 환경에 맞게 변신했던 것이다. 그래야 '기억'에 갇히지 않고, 과거에 고정되지 않을 수 있다.
유방은 자신의 뜻대로 역사를 다루려 하지 않고, 역사가 움직이는 흐름에 자신을 맡겨 거기서 뜻을 세워 나갔다. 우리는 그걸 '업적'이라고 한다. 그건 '사람'으로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기억'이라 함은 관념으로 지어진 틀, 넓게 말해 '이념이나 신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를 익숙함 속에 머무르게 하는 가치관일 수 있다. 정해진 마음, 즉 '성심(性心, 굳어진 마음)'이라 할 수도 있다. 인간으로서 '성심'을 갖지 않거나 '성심'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위대한 개인'은 '성심'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이다.
5.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그냥 사람은 이념이나 신념 혹은 가치관으로 고정되어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굳어 버렸거나 혹은 굳어가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만의 고유하고 진실된 내면의 활동성을 기반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는 사람이다. 장자는 이런 사람을 '진인(眞人)'이라 하고, 부처는 '진아'라고 했다. 난 '참나'로 사는 사람이라 한다.
이런 '사람'은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는 감화력이 있다. 공자는 이를 위해 "심재"하라고 한다. "심재"는 이념에 몰두하여 고집을 부리거나 끝없이 분화된 지식을 따라 이리저리 다니지 않고 마음을 통일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듣도록 하라"고 공자는 말한다. 그렇게 하여야, 감화력이 나온다는 거다. 감화력이란 오직 자신을 지배하는 '성심'의 덩어리들을 모두 제거하고 난 상태에 서야 가능해진다. "기로 듣는다"는 것은 갇힌 틀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이념이나 가치가 개입되기 이전으로서 세계의 가장 원초적 상태이다. 이 상태는 '기억'이나, '관념의 덩어리' 혹은 '정해진 마음'으로 서의 존재성이 무화 되고 오직 '자기 자신'으로만 드러난다. 그래야, 세계의 유동성, 변화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런 동참이 바로 감화력, 즉 활동성 혹은 지배력을 만들어준다. 이런 동참으로 자기 자신으로만 드러난 이때를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참사람, 진인, 진아, '진짜 사람'이다. 사람이 아닌 자가 우리 사회를 대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6.
우리는 이 '참사람'이 감화력을 발휘할 때, 그걸 '덕(德)'이라 한다. 그러니까 도덕에서 '덕'은 한 개인을 바로 그 사람이게 하는 유일한 터전이다. '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본원작인 활동력으로, 세계의 진실에 접촉하여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장자는 덕을 "천지를 관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말하며, 덕을 온전하게 발휘하여, 기억이나 정해진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생명력을 발동시키는 그 사람이 '진인'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집단이 공유하는 이념이나 신념에 좌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고립'되어 자신만의 빛을 발휘한다. 이 '사람'은 오리무중 속에서 '홀로' 조화로운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홀로'가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이미 있는' 문법에 갇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를 벗어난 '나'일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이미 있는 '기억'이나 '이념'이나 '신념'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덕'에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이 '사람'은 훈고의 기풍 속에서 편안해 하기보다는 비록 불안하고 어섹하고 생경하더라도 창의적 기풍 속으로 스스로 진입한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위대한 개인'이 되는 길이다.
▪ 학습된 사랑을 착실히 수행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을 과감히 시도한다.
▪ 기준을 수용하여 지키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기준을 생산하려 덤빈다.
▪ '우리'가 구사하는 논리에 빠지지 않고 '나'만의 이야기를 꿈꾼다.
▪ 혁명의 기억으로 핏발을 세우기보다는 힘 빠진 눈으로 관조에 빠진다.
▪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데에 빠지기보다는 우선 정해진 구조를 돌파할 나만의 동력을 발동시키는 데 몰두한다.
▪ 분석이나 비판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직접 행위자로 나선다.
7.
고전을 읽으며, 노자를 만나면 마음이 평화롭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무정(無正)'을 말하기 때문이다. 제58장 이야기이다.
其無正(기무정) :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이란 없다. 그러니 정답은 없는 거다.
正復爲奇(정복위기) 善復爲妖(선복위요): 올바름이 변하여 그른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하여 요망한 것이 된다. 지금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답이 되고, 지금 좋다고 하는 생각하는 것이 나쁜 것이 된다.
人之迷(인지미) 其日固久(기일고구): 사람의 미혹됨이 참으로 오래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 원리를 모르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길을 잃고 헤맨 시간이 오래되었다.
是以聖人方而不割(시이성인방이불할) 廉而不劌(염이불귀) 直而不肆(직이불사) 光而不燿(광이불요): 그러므로 성인은 모가 나도 자르지 않고, 날카로워도 벼리지 않고(예리하나 찌르지 않고), 곧지만 너무 뻗어 나가지는 않고(정직하나 뽐내지 않고), 빛나지만 눈부시게 하지는 않는다(빛이 나나 눈부시지 않다).
노자를 읽으면서, 내 일상에 적용하고 싶은 말이 "무정(無正)"이다. 정답은 없다. 그러니 다른 이의 삶에 함부로 끼어들거나,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함부로 지적하거나 훈계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랑한다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간섭하지 않을 때 오히려 세상은 저절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노자는 정답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정답을 갖고 사는 세상을 원했다.
8.
혼돈의 세상이 질서의 세상으로 변하자 세상은 정답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답은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의 삶에 하나의 질서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지금 세상이 혼란하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 질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다 보니 일상이 버겁다. 돌아가는 대로 살자. 정답이라는 질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구속한다. 종교, 이념, 윤리, 도덕 같은 것으로 개인에게 정답을 요구하기도 하고, 애국, 충성, 효도, 예절 같은 것으로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그리고 민족, 인종, 출신, 지역 같은 모습으로 변신 했었고, 훈계, 지시, 주의 같은 형식으로 인간의 개인적 삶에 부단히 끼어들어 간섭하였다. 노자는 이런 질서의 세계가 얼마나 개인의 삶을 짓밟고 무너트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질서라는 가면을 쓰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적 권력이었다.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도구로만 기능해야 한다. 공기와 물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부쟁(不爭)의 덕을 발휘할 때 비로소 권력은 영원히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거다. 노자 <<도덕경>> 81장의 첫 단어는 도(道)이고 마지막 단어는 부쟁(不爭)이다. <<도덕경>>을 딱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도위부쟁(道爲不爭)", 도란 싸우지 않는 것이다. 노자에게 '도'란 평화다. '무위'하기에 다투지 않고, 자연을 닮아 너그럽기에 다투지 않고, 비우기에 다투지 않고, 소유를 주장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몸을 앞세우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자랑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화목하기에 다투지 않고, 검소하기에 다투지 않고, 편가르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강해지려 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만족할 줄 알기에 다투지 않고, 어린아이를 닮기에 다투지 않고, 겸손하기에 다투지 않고, 일을 꾸미지 않기에 다투지 않는다. 권력의 강화와 영토의 확장을 위하여 더 큰 질서를 요구하던 시대에게 노자는 개인의 자유와 평범한 일상의 회복이라는 '인문학적' 이슈를 던졌던 것이다. 모든 인간은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야 할 당위성이 있으며, 어떤 권력도 인간의 삶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 제80장에서 자신의 이상적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9.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고,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옷이고, 내가 사는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고, 내가 즐기는 오늘의 일상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소국과민(小國寡民, 나라를 적게 하고 주민의 수를 적게 한다)의 세상을 제시했다. 왕은 권력은 가지고 있으나 통치하지 않고, 방어력은 갖고 있으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문명의 도구는 있으나 그 도구에 인간이 종속 당하지 않는 그런 평화의 세상을 노자는 꿈꾸었다.
10.
세상에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앞 글자를 따면 '정·비·공'이다. 정답이 없고, 비밀이 없고, 공짜가 없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세상엔 공짜가 없다'인 것 같다. 어느 개그맨 유행어 중 '소는 누가 키우나'가 있다. 지금 이 나라에선 소를 키울 사람은 없고 소를 잡아 나눠 주겠다는 정치인들과 포크를 들고 소고기를 기다리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만 있다. 공짜 소고기는 이 세상에 없는데도 말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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