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도덕경>> 제2장 (2)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9일)

노자가 보는 세상의 모습을 <<도덕경>> 제2장 앞 부분에서 엿볼 수 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제 못한 이야기 우선 좀 이어간다. 노자는 처음에 심미적 가치를 거론하며, '미(美, 아름다움)'와 '오(惡, 추함)'를 대비시키고, 다음으로 윤리적 가치를 거론하면서, '선(善, 착함)'과 '불선(不善, 차하지 않음)'을 대비시켰다. 어제 우리는 '惡'를 '악'이라 읽지 않고 '오'라 읽고, 그것을 '악'이라는 실체를 지칭하는 의미가 아니라, 미움이 증오나 기피를 나타내는 마음의 상태라고 말했다. 도올은 우리가 맹자의 성선(性善), 순자의 성악(性惡)을 마음 놓고 대비시키는 오류를 우리가 범하고 있다고 했다. 순자는 '성악'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성오'를 말했을 뿐이라는 거다. 인간의 본성을 존재론적으로 악하다고 규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본다. 인간이 왜 그렇게 혐오스러운, 미운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분석일 뿐이며, 그는 예의(禮義)에 의하여 그러한 혐오스러운 행동을 선한 본성으로 다시 되돌리려는 작위적 과정을 교육의 본질로 평가했 뿐이라는 거다. 도올의 주장이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좋은 놈이다"라고 하든가 "저 놈은 좋지 못해"라고는 해도, "저 놈은 악한 놈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구조 속에도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불선"이다. "악(惡)"자는 "악이 아니라, '추할 오'이며, 그것은 '미'의 상대개념이다. 성경에서도 악을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죄', 그러니까 '죄악'에 해당하는 단어가 "하마르티아"인데, 이것은 궁술에서 쓰이는 단어로서 '과녁에서 빗나갔다"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적인 주인공의 천성을 ‘하마르티아’라고 규정했다. 자신이 어제까지 가던 길을 옳다고 당연히 추정하고 그 길을 가는 행위다. 그런 마음이 ‘오만’傲慢이다. 오만은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하루를 어제의 습관대로, 어제의 문법으로 이해하려는 억지다. 그리스도교의 기획자인 바울도 이 단어를 이용하여 ‘죄’를 설명하였다. ‘죄’는 '신이 정한 인간을 위한 최선의 길로부터 이탈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죄’란 규율이나 교리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목표의 존재에 대한 무시이고, 설령 안다 할지라도 매일 매일 실천하지 않는 게으름이며, 그 길로부터 이탈하는 행위다. 이 ‘죄’를 고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죄는 나의 행위가 도덕적 선의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거다.

그러니까 노자의 생각은 아름다움에 대하여 추함을 말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우리가 선에 대하여 불선을 말해야 한다는 거다. 추함은 악한 것이 아니다. 추함은 그 자체로 적극적인 심미적 가치이다. 추함이 없으면 아름다움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조화의 문제인데, 조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개념적인 고정성을 가질 수 없다. 조화는 역동적 관계이며, 역동적 관계는 반드시 '새로움'의 요소를 창출해야 한다. 이 새로움의 요소는 항상 추함의 계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도올의 명쾌한 설명이다.

마찬가지로 선에 대하여 불선을 말하는 것은 선 그 자체가 실체화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불선의 계기로 인하여 선함은 새로운 선함을 더해간다. 모든 인위적 가치는 역동적 상(常, 늘)의 세계 속에서 끊임 없이 새로운 조화를 창출해야 한다. 고정된 완벽한 조화보다는 새로움을 지향하는 불완전한 조화가 거 고등한 것이다.  선에 대하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나 선의 고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올의 설명을 직접 들어 본다. "미가 곧 오요, 선이 곧 불선이다. 이렇게 철저히 가치를 개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상대적 가치의 대적적 관계를 상생적 관계로서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를 한 편 읽은 후 계속한다. 오늘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도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곳이 현관(玄關)이다. 현관은 출입구와 실내 사이에 있는 묘한 공간이다. 건물 내부지만 온전히 안이라 하기엔 조금 애매하다. 현관은 건물의 규모에 따라 크거나 좁고, 화려하거나 수수하다. 아예 없기도 한데, 이때 둘 데가 마땅찮 은 것이 신발이다. 현관의 주인은 신발이다. 신발은 사람과 땅의 직접적인 대면을 막아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옴으로써 더러운 것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다. 현관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 외출과 귀가의 반복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오늘의 화두에 어울리는 시를 찾아 기쁘다. 사진은 내가 자주 가는 산책 길이다.

현관/강기원

나는 밤의 현관에 서 있는 사람
현관에 고인 찬바람 속의 사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가물가물 걸치고
가만히 서서 발에 물집이 잡히는 사람
고개 든 채 잠든 오령의 멧누에 꿈속처럼
무릎 없이 변모를 기다리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의 덧붙임이다. "이 시에서 현관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고, “나는 밤의 현관에 서 있”다. 낮이 삶이라면, 밤은 죽음이다. 한 발을 밖에 걸친 나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다. 오령(五齡)은 누에가 네 번째 잠을 잔 뒤 고치를 짓도록 마련한 섶에 올릴 때까지의 사이를, 멧누에는 산누에를 말한다. 우화(羽化)할 때가 됐음에도 현실에 안주하는, 길들지 않는 야성이 내면에 존재함에도 ‘변모’만 기다리는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현관을 나서지 않으면서 자유인의 삶을 동경한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강기원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선과불선 #하마르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