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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올해는 입춘을 시작으로 "제철 행복"을 누려볼까 한다.

309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2일)

 

1. 
올해는 입춘을 시작으로 "제철 행복"을 누려볼까 한다. 이 아이디어는 작년에 선물 받은 김신지 작가의 <<제철 행복>>이라는 책에서 얻은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24 절기에 따라 1년을 살아본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절기에 따라 산다는 건 한 해를 사계절이 아닌, '24계절'로 촘촘히 겪는 일, 그건 곧 눈 앞의 계절을 놓치지 않는 것 만으로 행복해질 기회가 24 번 찾아온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지금 이 계절에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미루지 말고 챙겨야 할 기쁨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늘 살피면서 지낼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해마다 설레며 기다리게 되는 [나만의] 연례 행사"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2025년 을사년에는 나도 "제철 행복"을 찾아 보려 한다. 특히 거기서 기쁨을 찾아 보려 한다.

 

2. 
내 삶의 슬로건은 "고집스러운 기쁨" 속에서 사는 거다. 우리들의 감정 중에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 '기쁨'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차이가 있는가? 사전을 찾아 본다.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운 마음이나 느낌'이라면, 즐거움은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쁜 느낌이나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비슷한 것 같은데, 즐거움은 '어떤 상태'라면, 기쁨은 '어떤 행위의 결과'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없다가 얻게 되었을 때 오는 것'은 기쁨이고, '늘 있는 것'은 즐거움인 것 같다. 그러니까 기쁨이 즐거움보다 더 강한 감정인 것 같다. 늘 있는 사람은, 없다가 그것을 얻게 되었 때 느끼는 감정을 모를 것이다. 

 

3. 
사람들은 말한다. 40대는 외모의 평준화가, 50대는 지식의 평준화가, 60대는 재산의 평준화가, 70대는 영성, 정신 세계의 평준화가, 80대는 건강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왜 그럴까? 많이 가진 자의 즐거움이 적게 가진 자의 기쁨에 못 미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많이 아는 자의 만족이, 못 배운 사람의 감사에 못 미친다. 만족은 '물의 고임'이라면, 감사는 '물의 흐름'일 것이다. 이렇게 '+'와 '-'하면, 마지막 계산은 비슷하고, 모두 닮아 가기 때문 같다. 그러니 살다 보면 별 인생 없다. 현재를 즐기는 것이 남을 뿐이다.

 

4.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는 기쁨이고, '락'은 즐거움이다. 둘 다 '쾌(快)'의 감정이지만, '락(樂)'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동물도 느낀다. '희'는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희'에서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을 위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발적 불쾌'라 한다. 이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이다.

 

5. 
말이 나온 김에, 내가 늘 외우는 문장이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라야 흡족해 하는 것이 만족이라면, 자족은 어떠한 형편이든지 긍정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러니까 행복의 비결은 자족(自足)이다. 요즈음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보다 '욕심'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이럴 때 분수를 알고 자족(自足)할 줄 알면 빈곤 감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있는 것 만으로도 부자처럼 느끼며 살 수 있다. 

 

6. 
너무 따지지 말자. 다음은 류시화 시인의 페이스 담벼락에 읽은 이야기이다. "어느 영화관에서의 일이다.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국제 영화 상을 수상한 단편 영화를 보여 준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관객이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는 가운데 단편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스크린에 평범한 흰색 화면만 보일 뿐이었다. 1분이 지나도 흰 화면이고, 2분이 지나도 흰 화면이었다. 3분이 지나고 4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흰색 화면만 보였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것이 상을 받은 영화라고? 스크린 전체에 단지 흰색 뿐인데? 영화가 시작되기나 한 거야?’ 그렇게 8분이 지났다. 모든 관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이 영화에 상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멍청하군.' 그리고 9분 만에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이동했다. 카메라는 그때까지 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병원이었다. 그리고 병상에는 스무 살 청년이 누워 있었다. 그는 전신이 마비된 상태였다. 손, 다리, 얼굴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유일하게 기능하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리고 10분 후에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이 청년은 흰색 천장을 평생 바라봐야 합니다. 당신은 단지 8분 동안 보고 지쳤습니다.’"

그러면서 류 시인은 다음 질문을 했다. "올해 무엇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었는가?" 그리고 불쑥, 시인의 다음 문장을 읽고, "날개 달린 기쁨이여, 어디에 내려앉을까? 나무 위에서 두리번거리는 기쁨이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감각, 모든 동작에서 기쁨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무릎을 쳤다. 내 모든 감각, 내 모든 동작에서 다시 기쁨을 찾아야 함을 되찾았다. 이제 바오로 사도가 가장 먼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를 말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5:16-18) 이게 하느님의 뜻이라는 거다. 

 

7.
잭 길버트의 시 <변론 답변서>에는 “우리는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즐거움 없이는 살 수 없다/이 세상의 무자비한 용광로 속에서 /기쁨을 받아들이려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이 시인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 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럽게'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 성당은 매 미사 마다, 오른 손을 곧게 뻗으며 신부님의 선창에 따라 모든 신자가 함께 구호를 외친다. 그게 '기쁜 마음으로(laeto animo)" 이다.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잘 보낼 생각이다.

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좁다 여기면서, 문밖의 자연이 얼마나 크고 너른 줄은 잘 모른다. 그래 우리는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하다. 아니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한다. 그 곳은 공간일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다. 그곳이 유토피아일수도 있다. 우선 김기석 목사의 다음 이야기를 공유한다.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조선 시대의 화가 안견이 꿈속에서 거닐었다는 무릉도원이든,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아든, 장자가 꿈꾸었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그 꿈에 담긴 절실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척박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진동한동 달리느라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누리지 못한다. 누리지 못하는 삶은 그늘로 남는다."

 

8.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둘 곳이 있어야 한다. 나는 내 <인문 일지>이다. 우리는 흙에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떠나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미국 시카고 미술관에 걸려 있는 고갱의 그림 제목이지만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흙에 불안을 더하면 인생이고, 인생에서 불안을 빼면 흙이다. 불안은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숙명을 안고 살면서 지향을 잃지 않을 때 삶은 의젓해 진다. 지향이 중요하다. 이 지향이 내가 마음 둘 곳이다.

 

9. 
개인도 자신의 삶을 잘 영위하려면 자신만의 사명(使命)을 가져야 한다. 자신만의 사명의 울타리를 세우고 그 안에서 운동장을 만들어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명의 울타리 안에서 독서, 자연, 자신과 함께 하는 일상의 삶을 통해 심리적 안정 지대(마음 둘 곳)를 누릴 수 있는 자신만의 '퀘렌시아(querencia)'를 만든다. 이 '퀘렌시아'에서 상처를 힐링 해가며 평정심을 회복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래를 도모한다. '퀘렌시아'는 투우 경기에서 소가 휴식을 취하는 장소, '피난처이다. 이 안식처는 마음의 안식처, 육체의 휴식 공간 외부의 소요나 충격 으로부터 자유롭고 온전하면 충분하다.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치열한 생존 경쟁, 적과 동침하며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꾀하는 게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된 지 오래 이다.  자존감 회복을 위한 장소이다. 회복의 쉼을 주는 곳이다. 자아 회복의 장소이기도 하다.

 

10. 
그 다음으로 내가 마음에 두는 곳은 해마다 찾아 오는 계절이다. 올해는 그 기분을 글로 쓰며 "제철 행복"을 즐길 생각이다. "눈 앞의 계절을 바라보고 있으면 후회하느라 과거에, 걱정하느라 미래에 가 있는 마음을 계속 현재로 데려올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몸과 맘이 닳을 정도로 애쓰다 가도, 한 번씩 계절이 보여주는 풍경 속을 걸을 때면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곁에 두고 모른 채 살아온 답이었을까?"

이 답으로 우리는 공동체로 더 나아갈 수 있다. 욕망이라는 것이 우리 생존의 동력이지만, 욕망의 벌판에서 질주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이 고립돼 있음을 자각할 때가 온다. 욕망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개별 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별 짓기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타자를 위한 여백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욕망의 재배치가 필요하다.

 

11. 
우리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 기준은 욕망과 행동이다. 쉽게 말하면, 나란 누구인가를 알려면. 나의 욕망과 행동을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욕망과 행동을 바꾸면 된다. 그런데 왜 안 할까?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과 사유라는 정신 활동을 하지 않으면 행동의 패턴이 절대 안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일차적으로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이때 욕망은 충동에 가깝다. 삶을 능동적으로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쾌락을 증식하는 쪽으로 수동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든 내 것으로 소유하고, 거기에서 오는 쾌락을 만끽하고, 그게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내는 식의 패턴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패턴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게 어리석음, 불교 용어로 말하면, 무명(無明)이다. 본성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는 뜻이다.

 

12.
우리는 태양이나 산과 들로부터 공짜로 얻는 게 많다. 그러니 우리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속에서는 돈이 돈을 낳는다는 사실만 믿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오로지 박탈 감만 느낄 뿐이다. 그래 현대 인들은 벌어도 벌어도 불안해 한다. 그들은 스펙이나 재산하고 등가가 되어 버렸다. 나란 존재가 화폐로 환원되니까,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래 도박이나 성에 중독되거나 다른 이들 한 테 갑 질을 한다. 그리고 소유와 쾌락을 중심으로 욕망을 추구하다 보니 늘 불 만족이다. 이 사슬을 끊으려면 욕망과 행동의 동선(動線)을 다시 그려 보아야 한다. 재배치가 필요하다.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대칭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동선을 재 배치해야 한다. 등가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욕망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소유와 증식을 향해 나아갈 때, 그리고 쾌락의 무한 질주를 하기 시작할 때가 문제이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더 부추긴다. 그러니 그 구조와 사슬을 철저하게 성찰하고 그런 욕망의 궤도를 자아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유와 쾌락은 생명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 서는 창조가 아니라, 쾌락 혹은 퇴행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행동의 동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러려면 욕망도 재구성 되어야 한다.

 

13. 
중요한 것은 고립과 고독은 삶을 무겁게 만든다는 점이다. 영혼의 회복력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사람 답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한다.  공간으로 서의 장소이든 사람들이 맺는 관계이든 상관없다. 미셸 푸코는 현실화된 유토피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그곳은 어떤 권력 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세계다. 여기가 새롭게 꿈꾸는 '메타버스'일까? 위에서 아래로 계열 화된 질서가 아니라, 마치 잔 뿌리들이 한데 어울린 평등한 생태계이다. 사람들을 가르던 온갖 장벽이 무너지고, 낯선 이들이 우애를 나누며 일체를 경험할 때 삶은 가벼워진다고 믿는다. 공동체가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연결돼 생명과 평화의 생태계를 이루는 곳 말이다.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진다고 투덜거리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작은 천국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고립을 넘어 연대하려는 용기 아닐까?


행복한 일/노원호

누군가를
보듬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무의 뿌리를 감싸고 있는 흙이 그렇고
작은 풀잎을 위해 바람막이가 되어 준 나무가 그렇고
텃밭의 상추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가 그렇다.

남을 위해
내 마음을 조금 내어 준 나도
참으로 행복하다.

어머니는 늘
이런 행복이 제일이라고 하셨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