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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릇된 힘으로 세상의 순리를 역행 할 수 없다.

307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20일)

오늘은 대한(大寒)으로,  24절기 가운데 마지막 스물 네 번째로 '큰 추위'라는 뜻이다. 대한은 음력 12월 섣달에 들어 있으며 매듭을 짓는 절후이다. 양력 1월 20일 오늘이 대한이다. 말 그대로 하면 가장 큰 추위인데, 그건 중국 이야기이고, 우리 나라에는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대한이 소한보다 오히려 덜 춥다. 봄은 기어이 온다. 혼란은 우리 사회의 겨울도 곧 봄이 올 것이다. 되돌아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게 천지(天地, 하늘과 땅)의 마음이다. 노자 <<도덕경>> 제40장에서 말하는 "반자도지동(反者道지動)"을 나는 믿는다. 되돌아 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 즉 '도'의 자연스러운 작용인 것이다. 

1. 
최근에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면 가장 흔히 듣는 노래가 <나는 반딧불(작사, 작곡 정중식)>이다. 이 노래의 가사가 인문적이다. 노래 가사의 화자는 '내는 누구인가'를 깨닫고, 그런 자신을 믿는다. 가사 내용을 공유한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후렴)

한참 동안 찾았던 내 손톱
하늘로 올라가 초승달 돼 버렸지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너무 멀리 갔죠
누가 저기 걸어 놨어
누가 저기 걸어 놨어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돼 버렸지
내가 널 만난 것처럼
마치 약속한 것처럼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다시 태어났지

(후렴)

2. 
나는 "벌레"라 해도, "괜찮아 나는 눈부시니까". 몇 년 전의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가 소환된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3. 
왜 이런 이야기를 <인문 일지>에서 하는 가 하면, 최근의 극우파들이 초법적으로 날뛰는 사람들에게 다음 대사를 알려주고 싶어서 이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서부지법에서부터 이젠 헌재까지 가서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사회적 실패와 빈곤 또는 소외, 신체적 노화와 질병 등으로 인한 많은 불만과 분노를 '보수'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내 눈에는 반지성의 극우인데) 온갖 악다구니와 오물을 배설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반딧불> 노래를 불러 주고 싶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이들은 "전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극우 무리들이다." 문제는 변종 극우들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권력을 구가하려는 정치 모리배들과 저들을 이용해서 돈벌이 혈안인 자들이다. 거기에는 어떤 이념도, 신념도 신앙도 없고 공동체에  대한 진심도 없다. 류근 시인은 저들을 이렇게 말한다. 내란마저 좌우 진영 싸움으로 프레이밍해서[플레임, 즉 틀에 넣고] 이용해 먹는 자들에게 속아서 저토록 저능하게 굴어대는 저질들은 그냥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악취나 풍기면서 질병을 부르는 암덩어리들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점점 고령화되고, 그만큼 노인들은 더 가난해지고 소외될 텐데. 그러면 그럴수록 망국 집단에라도 투항하고 싶은 유혹도 늘어나고 이용해 먹는 악마들도 늘어날 텐데. 류근 시인은 걱정한다. 나도 걱정이다.

4.
인문 운동가의 사유를 말해 본다. 그릇된 힘으로 세상의 순리를 역행 할 수 없다. 세상의 순리를 믿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뜻대로 안 된다고 그릇된 힘을 쓰는 것은 늘 끝이 나쁘다. '항용유희(亢龍有悔)'와 '물극즉반(物極則反)'으로 말하는  <<주역>>의 주장이 세상의 순리이다. 그러니 절반의 성공에 만족하고, 절반은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항용유회(亢龍有悔)"는, <<주역>>에서 하는 말로,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반드시 후회 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주역>>에서는 만물의 변화가 아래에서부터, 내면에서부터 생긴다고 말한다. 높이 올라간 자가 조심하고 겸퇴(謙退)할 줄 모르면 반드시 패가망신 하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내려올 일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민심을 잃고, 현인을 낮은 지위에 두기 때문에 그 보좌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해도 뉘우칠 일 밖에 없게 된다. 

"항용(亢龍)"에 대한 공자의 해석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빠르게 높이 올라가면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너무 교만하여 민심을 잃게 되며, 남을 무시하므로 보필도 받을 수 없으므로 "항용"에 이르면 후회하기 십상이니 이것이 '항룡유회'라는 거다. 따라서 보름달보다는 열 나흘 달이 좋고, 활짝 핀 꽃보다는 몽우리일 때가 더 가치 있으며, 완전 중앙이 아닌 미앙궁(未央宮)이 더 여유가 있다. 새길 일이다. 물극즉반(物極則反), 만물이 극에 이르면 기우는 법이다. 보름달이 된 달은 조만간 작아져 초생달이 된다. 만조의 바다는 썰물로 갯벌을 드러낸다. 나라가 융성하면 쇄국의 운명을 겪는다. 생의 성숙한 노년은 죽음의 쇠락을 맞게 된다. 차고 넘치면 좋은 건만은 아니다. 왕성한 풀들은 낫을 맞게 된다. 가득 차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다 성장한 연륜은 쇠락을 맞게 된다. 만월의 달은 더 커질 수 없고 자연 줄어든다. 

5. 
자연은 더 강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잘 적응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적응하는 사람은 이런 부류를 말한다.
▪ 주변인과 건설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 
▪ 평화와 안정을 위해 일하는 사람
▪ 결과적으로 종의 생존을 견고히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 반대인 사람은 세상과 격리된다. 자연이 사람이 적응하지 않는다. 사람이 적응하며 생존방식을 터득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카톡에서 다음과 같은 얻게 되었다. "만사유시(萬事有時), 세상은 다 '때'가 있게 되어 있다. 그 '때'를 기다리며, 이젠 시사 유튜브를 끊고, 음악을 듣기로 했다. 독감으로 건강이 중요성을 알았고, 사람이란 자연 속의 그 작은 바이러스에 힘을 쓰지 못한다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6. 
이제 필요한 것이 "술은 반취(半醉), 꽃은 반개(半開), 복(福)은 반복(半福)"이라 했다. 술을 마시되 만취(滿醉)하면 '꼴' 사납고, 꽃도 만개(滿開) 상태보다 반쯤 피었을 때가 '더' 아름답다. 사람 사는 이치(理致)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충분한 만족(滿足)이란 있기도 어렵거나 와 혹 그렇다면 인생이 위태로워 진다. 결핍은 부실함이 아니라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결핍은 견디기 어려우나, 오히려 풍요가 우리를 타락시킨다는 게 나의 철학이다. 어려운 상황은 사람을 분발하게 하지만 안락한 환경에 처하면 쉽게 죽음에 이른다. 맹자는 이를 "生于憂患 死後安樂(생우우환 사후안락)"이라 했다. 이를 말 그대로 하면, '우환이 나를 살리게 할 것이고, 안락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뜻이다. 결핍으로 불편 해져야 삶이 자란다는 거다.

7. 
'구합(九合)은 모자라고 십합(十合)은 넘친다'는 옛 속담도 있듯이 반(半) 정도의 복(福)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모자란 듯,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살아 가라는 말이다. 이를 '소욕지족(小慾知足)'이라 한다. 매년 다짐하는 것이지만, 올해도 오늘도 입으로는 말을 줄이고, 위장에는 밥을 줄이고, 마음에는 욕심을 줄이며 살고 싶다. 욕심이란 성취하면 할수록 더 큰 욕심으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본래 욕심이란 만족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란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소욕지족(小慾知足)의 지혜가 행복의 기술이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천상세계인 도솔 지족천(知足天)은 무엇이건 바라는 것을 다 갖춘 곳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욕심을 비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일 것이다. <<아함경>>에서도 지족(知足, 족함을 아는 것)이 제일 부(富)요, 무병(無病, 건강한 것)이 제일 이(利)요, 선우(善友, 착한 도반)가 제일 친(親)이요, 열반(涅槃, 고요한 명상)이 제일 락(樂)이라고 하였다. 법정 스님도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를 말한 적이 있다.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며, 적게 앓고 적게 걱정 하라'란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몸에 병이 적고 머리에 생각이 적게 하자는 거다. 크고 많은 것보다는 작고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는 거다.

8.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즉 열흘 붉은 꽃은 없다. 성(成)한 것이 얼마 못 가서 쇠(衰)해 진다. 그러니  꽃이 진다고 그리  서글퍼 할  일이  아니다. 꽃이 빨리  진다고 더  애 닲아  할 건 업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지 않나?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지 않는다  한들 그  또한 무슨  대수일까? 꽃이  필 때가 있고, 질  때가  있듯이, 만사유시(萬事有時), 즉 세상은  다 때가  있게  되어 있다.  그때는  언젠가 오고, 그리고  그 모든 게 지나가게  되어 있다. 그 이치를  모르는  사람만이 다만 바둥거릴  뿐이다.

9. 
'사람은 다 때가 있다.' 그 때를 잘 알아야 한다. 이를 고전에서 '시중(時中)'이라 한다. '시중'의 사전적 의미는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중용>> 제2장의 "군자가 중용을 이룸은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냥 '때에 맞게 행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공자의 중용은 산술 평균이 아닌 '시중(時中)'이다. '중용'에 대해 조금 정리를 해 본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중용'은 책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주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삶의 방식이다. "중용적으로 산다"는 것은 한 인간이 우주가 부여한 자율 조절 장치를 통해 자신의 삶에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매 순간 벌어지는 일상사에 자신의 감정을 조화롭게 표출하는 '중화(中和)의 중용', 
▪ 그 때 그 때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며 사는 '시중(時中)의 중용', 
▪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영혼에 충실한 '신독(愼獨)의 중용' 등등은 
인간의 삶에 벌어지는 많은 상황 속에서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10.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 답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정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용'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꿰뚫는 원리이다.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은 자기중심과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중용의 인생'은 우주적 존재방식을 그대로 삶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용'은 중간이 아닌 역동적인 평형'이다. "중(中)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 있지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것의 이름이다."(주자) 여기서 용(庸)은 '평상시, '언제나'란 뜻이다.  '중용'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 '관계의 중용', '행동의 중용', '판단의 중용' 등 인간은 중용을 통해 완벽한 삶을 구현할 수 있다. '사람은 다 때가 있다'는 말을 하다가, '시중'이라는 말과 여기서 나온 '중용' 이야기로 빠졌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 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그 '때'를 모르는 한 찌질 한 인간을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만난다. '타산지석'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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