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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우리 안에는 괴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나를 조정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다.

배철현 교수의 <심연>을 읽으면서 "위대한 개인"되기 프로젝트 (16)
"위대한 개인이 위대한 사회를 만든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순간순간 나를 주저앉히는 '괴물'이다. 이 괴물은 내게 패배의 쓰라림을 안겨준다. 이괴물은 바로 내 안에서 나를 조종하는 또 다른 '나'이다.

괴물을 뜻하는 영어 '몬스터(monster)'란 '(한쪽과 다른 한쪽을 구분하는 경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존재'를 뜻한다. 마음 속 몬스터는 익숙하고 게으른 과거로 돌아가라고 끊임없이 나를 유혹한다. 사람들은 이 경계에서 쉽게 포기를 한다.

[경계에 서서 민감하게 줄타기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계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했다.
극은 필연적으로 타락하는 주인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도록 연습시킨다.

오이디푸스는 '발이 부은 아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존재는 바로 부모이다. 오이디푸스가 두 발로 걷지 못하게 발을 묶은 자는 바로 그의 아버지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혹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홀로 선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유일하게 예외이다. 부모의 울타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영원한 '유아' 상태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신탁을 묻지만, 신탁의 답은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딜레마였다. 그러나 그는 이 딜레마를 헤쳐 자립에 도달한다. 그는 자신의 양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테베로 가다가 '세 갈래 길'을 만난다.

그 길이,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면,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무시무시하고 이해하기 힘든 '코라'이다. 코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들판'이라는 뜻인데, 혼돈에서 질서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의 장소이다.

그 장소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인다. 여기서 아버지 라이오스는 인간이 극복해야 할 관습과 관행, 습관과 편견 등을 상징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부모는 어린아이를 자립하지 못하게 만드는 훼방꾼이다. 스스로 온전해지기 위해 아버지로 상징되는 과거를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

여기서 과거란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에게 부여된 정신적, 사회적, 역사적 얼개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서기 위해서는 이 얼개들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점검하고 취사선택해야 한다.

오이디푸스가 그 다음에 만난 스핑크스는 그리스어로 새로운 단계로 무모하게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목을 조르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핑크스는 인간을 스스로 두 발로 서지 못하도록 숨을 끊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스핑크스는 머리는 인간, 등은 사자이면서 새의 날개를 가진, 즉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은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동물의 복합체이다.

스핑크스는 묻는다. "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아침엔 네 발로, 오후엔 두 발 그리고 밤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답은 사람이었다. 그 답을 말하자, 스핑크스는 경계를 지키는 역할을 이행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절벽 위로 올라가 몸을 던진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길을 막고 있는 스핑크스는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 자신이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버려야 할 과거이자 자기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괴물이다. 다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 즉 자기 자신이라는 괴물을 죽여야만 했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여정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괴물과 대면하고 그것을 죽이는 일이다. 노자의 '오상아'가 생각난다. "내가 나를 장례치룬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 그러나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괴물이다.

구글에서 사진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