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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오늘 아침으로 꼰대 이야기는 마친다. 마침 몇일 전에, 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님의 글을 읽었다. 제목이 "꼰대가 되지 않는 법"이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갈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진다는 점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마치 더 이상 모르는 게 없을 것 같았던 우물 안을 나와서 새롭고 신기한 별천지를 끝없이 주유하는 것과 같다.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 배움의 시작이었다면, 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다가 무언가를 비로소 하나라도 깨닫는 순간, ‘아, 이때까지 이걸 내가 몰랐었구나’ 하는 걸 역설적으로 배우게 된다. 결국 배움은 나의 아둔함을 나날이 깨달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도대체 우리의 아둔함은 어디가 끝일까?

무언가를 배우려 하지 않고, 살던 대로, 하던 대로 살아가면 질문이나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두 가지 끝없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우주가 그렇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아둔함이다. 하지만 우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진 않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의 의문에 종지부를 찍고 어떤 사안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결코 끝날 수 없는 온 세상을 모두 섭렵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유학 중에 보면, 서양 학생들은 질문을 아주 편하게 하고, 교수 또한 쭈뼛쭈뼛 무척 미안해 하는 질문자에게 “어리석은 질문이란 원래부터 없네. 어리석은 답변들만 많을 뿐이지"라면서 학생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가끔 당돌한 질문이 불쾌함을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액면 그대로의 질문을 넘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면서 저의를 의심받는 순간, 대화는 불가능 해진다. 실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말이 아닌, 정황과 분위기로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컨텍스트(context)' 사회의 전형이다. 문제 해결이나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공동의 고민이 아닌, 소모적인 신경전과 편짜기,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꼰대들의 사회가 그렇다. ‘나 때는 말이야’, ‘내가 한번 해봐서 아는 데’로 시작하는, 질문 자체의 무용론이 그것이다. 신념에 대한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누구나 나이와 무관하게 꼰대가 될 수 있다.

다음 문장은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그 요지는 알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번 90% 정도의 확신을 갖고 판단과 선택을 한다고 할 때, 단 10번이라도 모든 판단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확률은 0.9를 10번 곱한 것으로 약 35%가 된다. 물론 모두 틀릴 가능성도 0.1을 열 번 곱한 것으로 대단히 희박하지만, 매번 90%의 확신을 갖고 임해도 그 선택이 10회를 넘어가게 되면, 맞거나 틀릴 확률이 65% 이상이라는 얘기다. 매번 완벽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한, 선택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 모든 것을 다 맞힐 확률은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더욱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요지는, 우리는 매번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그 이전까지의 선택의 결과들을 교훈 삼아 열린 질문들을 통해 실질적인 확률을 높이지 않은 이상, 늘 90%의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선택이 늘어날수록 꼰대가 되는 일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정답을 구하려는 어리석음이나, 이젠 답을 얻었다는 안도감이 필요한 게 아니다. 투명하고 열린 미래 사회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 선택의 순간마다 함께 나누는 열린 질문과 자성의 노력이다. 이게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내가 다 맞지 않다. 열린 사고로 내가 틀렸음을 인지하고 자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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