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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지성의 연마'

<<장자>> 외편 제12편인 "천지(天地)"에 "성인은 새끼 새처럼 먹는다(鷇食, 구식)"는 말이 있다. 새끼 새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저 하는 일은 먹이 구하러 간 어미 새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 뿐이다. 어미 새가 돌아오면 어미 새의 입 속에 뭐가 들었는지 상관하지 않고 입을 쩍 벌린 채 기다린다. 맛없다고 뱉아내는 일은 없다. 그저 입 안에 넣어주는 먹이가 감사할 따름이다.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풍요로움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향유하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그럼 이제부터는 어제에 이어, 에로스의 충동과 로고스의 비전을 결합하여, 소유와 집착에서 로고스의 네트워크로 건너가 고전과 접속하여 세상을 바꾸는 힘을 찾고 싶다. 여기서 에로스라는 말은 그냥 연애, 성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동력이다. 타자를 향해서 맹렬하게 돌진하는 힘이다. 그 힘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驚異, 놀랍게 신기하게 여김)를 만들어 낸다.

여성들은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서 당당하게 신체의 능동적 에너지로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니 에로스가 억압을 겪고, 신체에 엄청난 소외가 일어난다. 어제도 말했지만, 소외는 소통의 반대로 교감이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런 소외는 늘 결핍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결핍은 또 청춘의 상징인 에로스의 에너지가 억압되고 봉쇄된다. 즉 흐르지 못하고 막힌다. 그러니까 에너지가 흐르게 하려면 화폐와 소비가 제공하는 기준들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젊은 청춘들이 예뻐지려고 자기를 꾸미고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있으면 어린애 취급을 당한다. 그런 현상은 봄이 왔는데 새로운 게 생성이 안 이루어는 것과 같다. 예컨대 화초가 되는 거다. 화초(花草)는 누군가가 계속 길러 줘야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20세기는 모든 걸 통계와 수치로 예측할 수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의 예측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미숙은 "자유롭고 유연하게 살아가면 된다" 했다. 이젠 어설픈 스펙이 아니라, 진짜 내 몸, 내 육체, 내 신체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에너지만 있으면 불확실성의 시대를 아주 유연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에로스적 충동에는 목적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타자를 향해 돌진하는 에로스로 일어나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에로스적인 충동이 막 솟구치면 그냥 세상을 모험하는 거다. 뭔가 계산하고 목표를 먼저 설정하지 않는 거다. 목표를 정해 놓으면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까 불안하다. 그러면 모험심이 줄어든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어떤 관계, 활동, 자신의 삶의 비전이 아니라, 그 목표가 화폐의 양과 권력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화폐의 양이나 자신이 누리는 권력이 우리들에게 평정을 주지 못한다.

청춘의 에로스 충동에는 목적이 없어야 한다. 그냥 타자를 만나는 것이다. 타자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도 하고, 더 나아가 우정도 맺고, 우정의 가장 최고 경지인 사제 관계도 만드는 거다. 실제 스승을 만나도 좋지만 책으로도 만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세계와 인간들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힘이 에로스이다. 문제는 에로스가 카오스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그래 이 카오스를 향해 달려갈 때 거기에 리듬과 비전을 부여하는 것을 로고스라 한다. 나는 에로스의 총동적인 힘에 차서(次序)를 둔다는 말을 좋아한다. 차서의 다른 말이 목차인데, 좀 엄밀하게 말하면, 차례(次例)와 질서(秩序)가 합쳐진 말이다. 순서 있게 벌여 나가는 관계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서 돌아오는 기회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개념이다.

실제로 우주는 우아한 코스모스(cosmos, 질서)가 아니라, 좌충우돌, 천방지축의 카오스(chaos, 혼돈, 무질서)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끊임 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방향도, 목적도 없다. 변화 자체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태양계의 중심 별인 태양은 지금도 계속 폭발 중이라고 한다.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으로 현재 50 억 살쯤 된다. 50억 년쯤 뒤에는 완전히 폭발해 은하계로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당연히 태양계에 속한 지구 역시 그럴 것이다. 거기다 23,5도 기울어져 갸우뚱한 상태로 자전과 공전을 하느라 바쁘다. 계절은 끊임없이 돌아오지만 단 하루도 동일한 날씨를 반복한 적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흐름에 차서(次序)와 리듬을 부여한 것이 역법이다. 차서와 리듬, 새롭게 다가오는 단어이다. 그 역법은 1년, 4계절, 360일, 황도, 24절기, 72 절후 등등이다. 이런 척도가 없다면 어떻게 매일, 매년, 일생이라는 주기가 탄생하겠는가? 시간과 공간의 원리이다.

로고스 이야기로 다시 되돌아 온다. 로고스는 지성, 지혜,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원동력이 로고스이다. 그래 우리 청춘들은 에로스적인 충동으로 로고스적인 비전을 결합시켜야 한다. 이 로고스를 키우기 위해서 지성이 필요하다. 지성은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가치를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소유와 집착에서 로고스의 네트워크로 건너가야 한다. 사랑을 하나는 것은 신체 안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데, 이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온갖 것을 실험해 봐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소유하지 않아도 사랑이 흘러 넘치게 해야 해요. 사랑은 두 사람의 에로스가 융합되어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내 삶을 선물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존재를 무한 긍정하게 하려면 사랑하는 대상이 참으로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때부터 자기 인생을 잘 돌보고 자신이 원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또한 해야 된다. 이게 로고스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상대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다. 그리고 그러려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런 로고스의 비전을 친구에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 시켜 가다 보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비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가도, 우리는 인생, 생로병사 전체를 살아갈 수 있는 아주 든든한 정신적 기둥을 얻게 되는 거다, 그게 로고스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두 죽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질문과 해석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죽음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질문을 하면, 그것과 마주하게 된다. 마주하지 않고, 우리가 두려움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만약 두려운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한 번은 마주해야 한다. 도망가거나 숨거나 덮어서 해결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어떤 비밀도 비밀 자신이 스스로를 폭로하게 되어 있다. "세상은 불공평해도 세월은 공평하다." (주철환 PD) 세상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세월이 이긴다.

다시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로 되돌아 오면, 에로스가 충동적이고 카오스적인 힘이라면, 이 힘에 리듬을 부여하고 어떤 방향을 부여하는 지평선이 로고스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지평선은 절대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거다, 그러니 달려가는 거다. 달려간다는 사실 자체가 지평선의 힘이다. 그러나 공부라는 것은 끝이라는 게 없다. 목적도 없다 그저 하는 거다. 목적이 있다면 삶 자체,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공부이다. 그 공부는 사람을 통해서 하는 거다. 사랑과 우정, 사제간의 교감으로 자신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거다. 그 네트워크가 에로스와 로고스가 만나는 삶의 현장이 된다. 이걸 고미숙은 접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런 접속은 고전을 만나는 방법도 있다. 이런 접속을 하면, 우리 인생이 확장되고 증식된다. 그런 접속이 일어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스토리로 만들 때 글쓰기가 일어나는 거다. 그런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리에 대한 열정'인 로고스를 훈련하려면, 읽고, 쓰고 말하는 거다. 이걸 '지성의 연마'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연마를 통해 얻는 지성의 기쁨을 모르면, 사람들은 화폐를 향해 달려간다. 돈, 돈 돈만 외친다. 화폐로 소비를 하고, 화폐로 사람을 지배하는 쾌감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 유혹을 끊기가 쉽지않다. 돈이 많으면 상품을 소유하고 사람을 지배하는 쾌감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권력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기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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