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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대나무 이야기

오늘 아침 사유는, '그렇다면 이 100년의 인생을 어떻게 살까'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이 100년동안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알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주어진 시간은 100년이다. 이 실타래같은 질문들을 푸는 만큼, 아마도 자기 인생이 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그 실타래를 푼 양이 곧 내 삶의 양일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느끼고 아는 만큼이 우리들의 인생의 영역이고 한계일 것이다. 사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인문학은 골치 아프다. 인문학을 몰라도 사는 데는 불편하지 않고, 지장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 왜 아침마다 장문의 글을 쓰느냐? 내 딸은 지금은 적응했지만, 전에는 같이 산책하려 하지 안했다. 내가 너무 주변을 관찰하다는 이유이다. 왜 그랬냐 면, 나는 느끼고 아는 만큼이 내 삶의 크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어쩌고 저쩌고, 말하면서, 주변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만한 삶의 크기로 살다가 "대꽃이 피는 마을"로 건너가는 것이다.

대꽃은 백 년 만에 핀다고 한다. 그리고 죽는다고 한다. 우리 인간들의 백 년 인생과 같다. 대나무는 사람이 청소년기에 성장하듯이 한때 우후죽순으로 자란다. 대나무는 4-5년 동안은 뿌리를 내리는 데 몰입하므로 이 기간에는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뿌리가 넓고 깊게 퍼져 나가고 있는데도, 뿌리가 다 자라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자라기 시작한다. 그래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유가 이어진다.

하나는 대나무는 뿌리가 사방으로 퍼져 있어 웬만한 가뭄이나 비바람에는 전혀 문제 없다. 대나무는 우리에게 말한다. 더디게 자란다고 낙담하지 마라.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니. 지금 우리들의 삶이 팍팍하고 고단한데, 우리들의 발검음이 더딘 것은 사회 체질을 바꾸고 뿌리를 깊이 내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위기이지만 오히려 이것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다른 나무와 다르게, 대나무는 평생 자라지 않는다. 죽순이 솟아나면 그 종자를 알 수 있다. 잘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대나무도 왕대는 죽순이 처음부터 크고 굵다. 졸대는 처음 죽순이 가늘다. 우리 인간도 될 성싶은 아이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있고, 안될 성싶은 아이는 싹수가 노랗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 나온 김에 대나무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본다. 대나무는 다른 나무와 다른 특성이 마디마디가 있다.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다. 그리고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 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두꺼워지려면 옆 누군가의 공간을 빼앗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듯하다. 그래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대나무는 단단하기 위해서 어쩌면 비움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위로 곧기 위해,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하기 위해 단단함과 비움을 선택한 대나무를 본받고 싶은 아침이다.

대나무가 속을 비우는 데는 다 생각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제 몸을 단단하게 위해 속을 비웠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대나무에게서 배워야 한다. 살만 찌우고, 더 많이 소유하면, 단단하지 못하다. 대나무는 자기 속을 비웠기 때문에, 어떠한 강풍에도 흔들리지 언정 쉬이 부러지지 않는다. 대나무처럼, 산다는 것은 끊임 없이 쌓이는 먼지를 비우는 것일지 모른다.

대나무는 휘어지지만 꺾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유연성을 대처하는 태도이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렇게 되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 지고, 뜨거우면 김이 되어 날아가고, 차가워지면 얼음으로 굳고, 이렇게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물이 '물임'과 '물됨'을 잃는 일이 없어 그렇게 여러가지로 적응하는 것 그 자체가 물의 정체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