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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사실을 알라. 그리고 남들과 달리 그 사실을 해석하라. 그리고 진보를 위한 의심을 하라."

부산일보 김은영 논설위원은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표현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해 이어 말하였다. “생각 없음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무엇이 다를까?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이주시킨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은 결코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모범적이기까지 한 시민이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저질렀다. 아무 생각 없이 상관의 혹은 상부의 지시나 명령을 무조건 충실히 이행했다고 악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그 지시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문제는 나치 정권이 몰락하고 전체주의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도 아렌트의 섬뜩한 경고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김은영 논설위원의 주장에 나도 동의한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삶과 공동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관해 충분히 사유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너무 바빠서, 혹은 문제가 복잡해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습관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때때로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기에 십상이다. 늦었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지 않으려면 결코 생각을 멈춰선 안 된다고 강조한 아렌트의 말을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문장과 함께 서양은 근대(모던, Morden)가 시작되었다. '생각하는 나'는 진리를 체현(體現)하고, 그 진리의 실현을 위해 꾸준히 나아간다.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고, 이 합리적인 생각이 인류를 자유롭게 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전제는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나'에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 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생각 당하는 존재라면 어떻게 되는가?

미셸 푸코부터 문제를 삼다가,  포스트모던이즘은 생각하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근본적인 진리에 도달했고, 이 진리를 기반으로 상식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의심한다. 포스트모던이즘은 "권력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 당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힐링 인문학'이 아니라, '필링(peeling) 인문학'이 시작된다. '필링 인문학'은 생각을 지배하는 모든 권력, 구조, 자본주의의 관계를 문제 삼아 내가 진짜 생각하는 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필링의 인문학'은 실존적 나가 생각 당하는 나인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성찰하는 나'가 '필링하는 나'라고 주장한다. '필링 인문학'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각하는 나인가, 생각 당하는 나인가, 이 질문을 하면서 내 생각의 제작자를 찾아내 맞서자는 것이다.

사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을 때, '생각하는 것'은 "방법적 회의"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의심해 보라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방법적 회의"란 무조건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서의 회의를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볼테르는 "의심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확신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고 말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회의로 끝나고, 기꺼이 의심하면서 시작하는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끝나게 된다"고 말했다.  자기 힘과 전략을 완전히 확신할 때는 오만함 때문에 눈이 멀게 된다. 내가 아는 것에 대한 확신을 숙고하고 늘 회의하고 의심해 보는 것이 생각하는 일이다.

에셋 플러스 회장, 강방천이 늘 직원들에게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청언>이라는 분의 블로그에서 만났다. "사실을 알라. 그리고 남들과 달리 그 사실을 해석하라. 그리고 진보를 위한 의심을 하라." 이게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생각의 힘이 생길 것이다.  우선 사실을 알아 보아야 한다. 그래 관찰하는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실이 독이 될 수도 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그래서 충돌 시키고 그래야 자기 것이 된다. 이때 의심은 중요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확신은 오만을 낳고, 그 오만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사람은 오만에 빠지면 눈이 먼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해야 할 현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기 앞에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있어야 할 시간과 장소를 헤아려 아는 사람이다. 반면 오만에 빠진 사람은 장님이 되고, 그 뒤에 찾아오는 불행을 만나게 된다. 그것을 그리스어로는 '네메시스'라고 부른다. 이 말은 '복수'라고 번역되는데, '내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그 어떤 것을 받는 것'이란 뜻이다.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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