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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선이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배철현 교수는 말한다. 인간은 다음의 세 가지에 집착한다고. 자식(子息), 명성(名聲) 그리고 부(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과 만나다 보면, 대부분이 이 세 가지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분신인 자식을 통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착각한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 애쓸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은 재산을 모두 물려주려 한다. 자식은 우리의 몸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신의 선물이며, 독립적인 생명체이다. 그들이 자립하는 인간이 되도록 안내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다.

그리고 명성에 집착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내가 곧 나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흔히 과거에 이러한 일을 했다고 자랑하며 과거의 추억으로 먹고 산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결과물이며 동시에 미래의 내가 되길 위해 탈출해야 할 감옥이다. 오늘의 나는 내일 도착해야 할 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구도자일 뿐이다.

그 다음은 부에 집착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번 돈의 양이 곧 자신의 인격이자 실력이라고 착각한다. 부를 관장하는 운명의 여신은 부의 편중을 싫어한다. 자신이 부를 쥐었다면, 자신보다 운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 부가 자신에게 좀 오래 머물 뿐이다.

착각하며 정해진 순간을 사는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선행(善行)이다. 배철현 선생의 글에서 알았다. 선이라는 단어는 고전 히브리어로 '토브(tob)'이다. 구약성서에서 토브는 올리브 기름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종종 등장한다. 그러니까 토브는 그 기름이 최상급인지 아닌지는 향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최고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나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반찬의 향기와 맛이 '토브'이다. 그리고 '토브'는 위대한 성악가의 아름다운 목소리이며, 예술가의 조각이나 회화, 대자연의 장관을 형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선(善)은 아름다움이고, 거짓이 아닌 진실된 것이다. 여기서 진선미(眞善美)가 다 만난다.

'토브'는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냄새가 좋고, 맛이 좋고, 촉감이 좋은' 상태를 말한다. 향기와 맛처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토브'의 선(善)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어떤 것이다. 선이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그 기준이 절대적으로 상대방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선은 개념이 아니라, 행위이다. 선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완성된다. 그러니까 정해진 순간을 사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가 선행(善行)이다. 배철현 교수는 구약성서의 <미가서>를 인용하며, 선행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네가 만난 신이 요구한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마가서> 6:8)

미가는 우리가 가장 매력적인 향기를 잔잔하게 내뿜을 수 있는, 인향(人香)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해주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동물적인 인간에게서 신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 정의 실천하기
- 자비 희구하기
- 겸손 생활하기

(1) 정의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미쉬파트'란다.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공평하게 판단하다, 재판하다'이다. 그러니까 미쉬파트의 소극적 의미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벌을 넘어 사람들 각자에게 걸맞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성서는 지속적으로 미쉬파트는 '과부, 고아, 이민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그들의 바람을 사회에서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오늘날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한 부모가정, 노인계층이 포함된 기초생활자, 차상위 계층 등이 바로 이 미쉬파트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사회의 성숙도와 정의 실현 정도는 순전히 그 사회가 이 계층을 어떻게 대하느냐 에 달려 있다. 이 계층에 대한 소홀이나 무관심은 자비의 부족이 아니라, 신의 제1명령인 미쉬파트를 범하는 죄악이다. 신이 인간에게 원한 첫 번째 명령,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선은 사회의 취약계층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신을 위한 '예배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평상시의 작은 선행이 성전에서의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다.

(2) 자비 희구(慈悲 希求)를 히브리어로 하면, '아하보쏘 헤세드'라 한다. 아하보쏘는 보편적으로 '사랑하다'로 해석한다. 특히 '인간들 간의 사랑, 즉 부부, 자녀, 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 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정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인 감정이 내포된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희구(希求)'로 번역할 수 있다. 헤세드(chesed)는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고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된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람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총애(寵愛)'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이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다. 신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신은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이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무아'의 상태로 진입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영어로 'I'm nothing'의 상태가 되어야 아가페, 헤세드의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의 생존은 바로 어머니의 헤세드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통해 헤세드가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이타적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배운다. 신은 우리에게 자기 희생적 사랑을 목표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경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장의는 실천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인 헤세드는 희구하라는 명령이다. 희구하라는 말의 뜻은 바라서 요구함이다. 그러니까 헤세드를 원하고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말이다. 희구의 비슷한 말은 간구(懇求)이다. 간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구함'이란 말이다. 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갈구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헤세드는 관심의 단계를 넘어선다, 그것에는 베푸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일치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아파하는 갓난 아기의 고통을 어머니도 느끼듯이 인간은 헤세드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나의 삶으로 인식한다. 신은 그런 삶이 어렵다고 판단해 헤세드를 희구하고 간구하라고 주문한다.

(3) 겸손(謙遜) 생활 하기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만난 신의 명령에 따른 겸손 생활 하기'이다. 겸손은 자기 비하적인 면과 동시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리더들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이 겸손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겸손함은 '자신의 신'을 찾아 매일매일 게속 되는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금은보화(金銀寶貨)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했던 거처럼, 우리 인간이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그 지극한 일부를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신'이란 삶의 존재 이유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된 신을 숭배하고 그 신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생을 산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신'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신을 만나는 지름길이 때문이다. 그 신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善行)이라고 고언을 했다. 그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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