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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생명 진화의 3단계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8월 19일)

아침에 일어나 맨발 걷기를 하면서, 이어폰을 끼고 박문호 박사의 유튜브 강의 듣는다. 거기서 배우는 흥미로운 것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 사이에 몸은 깨어나고, 온 몸에 피가 흐르며 에너지가 생겨난다. 흙 길을 걸을 수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이 집 가까이에 있어 감사하다. 오늘은 솟아오르는 태양을 환희 속에서 맞이했다.

오늘 아침에 들은 내용은 '불안과 공포가 다르고, 호모 사피엔스가 불안을 처리하는 한 단계 높은 인지 작용을 출현시킨 것이 의식'이라는 것이었다.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을 서술해 본다. 우리의 뇌는 정확성을 위해 진화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뇌는 실재 아닌 것만 본다는 거다. 예컨대, 우리가 어느 곳에 갈 때 길을 찾기 위한 지모만 본다. 주변을 살펴 가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지도는 이미지이다. 우리의 뇌가 처리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미지는 생각의 단위이다. 우리의 사고작용은 이미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이미지를 불러 링크하는 그 '연상'을 우리는 생각이라 한다. 그러한 이미지는 반드시 느낌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미지가 느낌을 수반하며 '원한다'는 상태가 우주에 출현했다. 자연이나 동물은 원하는 게 없다. 인간만이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 했다. 그러니 자유롭고 싶으면, 원하는 것을 없애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박문호 박사의 강의에서 '진짜'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밝힌 "생명 진화의 3단계"였다.

1. '감지-반응' 단계: 박테리아 수준
2. '감각-운동' 단계: 동물 수준
3. '지각-행동' 단계" 인간

동물은 반응을 하고, 인간은 행동을 한다. 생명 현상은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반응을 잘못하면 생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뇌과학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1단계: 비의식적 인식: 여기서 인식은 '안다'는 말이다. 박테리아나 벌레, 곤충들의 뇌이다.
2단계 주지적 의식: 지각, 개념, 의미가 나온다.
3단계 자기 주지적 의식: 여기서 감정과 자아(self) 스키마가 나온다. 스키마는 기억된 개념, 상황을 파악하게 하는 비의식적 표상으로 정의된다. 쉽게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 별다른 의식 없이도 행동이 연결되는 상태를 말한다. 스키마는 상황을 만나면 발현되는 감정과 자아이다. 감정과 자아의 출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은 느낌의 세계에는 불안과 공포가 있다. 그 차이는 공포는 대상이 있고, 불안은 대상이 없다. 불안은 막연하다. 반면 공포는 가도가 강한데 대상이 사라지면 해결된다. 그런데 불안 다음과 같이 4가지 속성이 있다. 불안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언제 끝날지 모르고, 얼마나 지속될 지 모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이 불안은 불확실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줄이려 출현한 것이 자아(self)이다. 그래 인간은 자기 주지적 의식을 하는 거다. 박문호 박사의 유튜브에서 배운 거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불안을 없애려면,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은 자신의 관심사를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끊임없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다. 내 실력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면 불안하지 않다. 그러나 성장이 목적이 되는 것은 싫다. 그냥 성장하며 사는 거다. 목적 없는 삶을 살아내는 거다. 그것이 나에게는 노자적 삶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세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만져지는 것보다 더 세다. 도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고, 가장 만져지지 않는 것이다, 가장 높아서 가장 세다. 따라서 노자는 '도'를 억지로 개념화하여 '크다(大)'고 하였는데, 이 '크다'는 말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전체 우주의 존재 원칙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전체는 가만히 있는 정지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부단한 운동 속에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 빠뜨리는 곳이 없는 부단한 운동의 방향은 먼 곳을 향하여 있는데, 이는 어떤 극한을 향하여 간다는 뜻으로 보았다. 사물의 발전은 극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그 극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전체 자연의 운행 모습이었다. '대(大)→서(逝)→원(遠)→반(反)'은 전체 운행의, 즉 도의 운행을 나타내는 전략 아래 동원된 유기적 의미 연관 고리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 어떤 것도 '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득도(得道)의 길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가까운 것과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영역에 가까운 쪽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면 된다. 예컨대,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적인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도에 먼 쪽의 것이 보내는 유혹을 이겨내고, 가까운 쪽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를 발휘하여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는 승리를 한 번 경험하면서 우리는 점점 우주적 삶의 경지로 이동한다. 결국 우주적 삶은 모순적 상황에 처한 매우 미미하고 고독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하는 그 찰나적 순간에서만 피어난다. 이 용기가 여기 멈춰 있는 나를 저기로 건너가게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노자는 이런 상황을 "습명(襲明)"이라 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자기는 여지없이 깨지고 알지 못했던 곳으로 도달해간다. 여기 있는 자기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저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미미한 자신에게 '그렇다면 나는?'이라는 질문을 계속 해대면서 일상에서 작은 승리를 경험 시키는 일이 바로 우주적 삶이다. 그건 내 일상에 '틈'을 내는 일이 될 것이다.

틈에 대하여 - 고영민

책장의 책을 빼내 읽고
제자리에 다시 꽂으려고 하니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다

빽빽한 책 사이,
있던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한 쪽 모서리를 걸치고
열심히 디밀어도 제자리를 못 찾는다
한 권의 틈을 주지 않는다
옆의 책을 조금 빼내
함께 밀어 보니
가까스로 들어간다

내가 네 안에 반듯이 앉도록
조금만 그렇게 미궁을 들썩여다오
없던 틈으로 당겨져
내가 들어간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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