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화를 들어 본다.

- "네발짐승은 아주 판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걷습니다. 측대보(側對步)와 대각보(對角步)가 그것이죠. 측대보는 오른쪽 앞발과 오른쪽 뒷발이 동시에 나가는 방식이고, 대각보는 오른쪽 앞발과 왼쪽 뒷발이 함께 나가는 방식이죠.” 내심 놀란 그가 “저 암소들은 대각보로 걷고 있군요”라고 말하자 그 기자가 말을 이었다.
- “아직 동물학자들이 다 밝혀내지 못한 수수께끼입니다만, 개나 소 같은 가축은 대부분 대각보로 걷습니다. 반면에 야생의 네발짐승은 측대보밖에 몰라요. 가축의 걸음걸이를 측대보에서 대각보로 바꿔놓은 것은 인간의 존재, 어떤 문명효과가 아닐까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고두현 시인이자 논설위원의 칼럼이다. 이 대화는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와 한 기자 사이의 대화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셸 투르니에는 통찰력과 유머를 겸비한 작가다. 2016년 타계할 때까지 성찰적 지식과 미학적 감성으로 세상을 그렸다. 파리 근교에 살던 그에게 어느 날 한 미국 기자가 찾아왔다. 기차역까지 차로 마중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둘은 암소 떼를 만났다. 소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 그는 네발짐승을 유심히 살폈다. 새로운 관찰은 새로운 통찰로 이어졌다. 그래 관찰이 중요하다.
그의 관찰 결과 이상적인 걸음걸이는 역시 '대각보'였다. 코끼리나 낙타처럼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다른 쪽으로 기울이며 뒤뚱거리는 '측대보' 보다 '대각보'가 더 균형 잡힌 걸음걸이였다. 그는 이 같은 성찰의 결과를 ‘측대보와 대각보’라는 에세이로 써서 산문집 《예찬》에 실었다.
그는 에세이에서 “땅바닥이 고른 평지에서는 대각보로 걷는 것이 유리하고, 울퉁불퉁하거나 바위가 많은 경사지에서는 측대보가 낫다”며 “측대보는 야생의 걸음걸이요 대각보는 문명의 걸음걸이”라고 표현했다. 거칠고 야만적인 행동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는다. 최근 우리 사회를 격랑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는 정치적 행태도 그렇다. 이념에 사로잡혀 상대 진영을 사냥꾼처럼 몰아붙이고, 정제되지 않은 거친 주장을 경쟁적으로 내뱉고 있다.
이렇게 한쪽으로 쏠리고 뒤뚱거리는 ‘측대보 정치’의 결과는 ‘말’이 아니라 ‘돌’이 되어 돌아오기 쉽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문명은 화가 난 사람이 ‘돌’을 던지는 대신 최초로 한마디 ‘말’을 하는 순간에 시작됐다.” 인간과 함께 평지에 사는 가축은 양쪽 발 교차하는 '대각보' 걸음인데, 산비탈 사냥하는 야생동물은 한쪽 발 동시에 내딛는 '측대보' 걸음이다. "대각보 걸음처럼, 완급을 조절하고 균형 찾는 게 문명화이다. 이제 '생각의 걸음새'도 함께 돌아봐야 한다."(고두현)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기렸다가 하여야 한다는 거다. 아니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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