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전 오늘 글이에요.

지난주는 대만작가 장쉰을 만났다. 주제는 ‘고독과 저항’이다.
1) 현대인에게 고독은 친숙한 단어이다.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개인은 마음 붙이지 못하고 쳇바퀴 따라 돌며 일상을 만들어간다. 외로움에 주눅 든 채 타인의 선택에 눈치껏 기대며 하루를 보낸다. 장쉰은 고독으로 살아갈 힘을 키우자고 설득한다. 고독은 스스로와 마주하는 시간이다.
2) 장쉰은 소설로 청년들에게 세상과 마주하도록 눈을 뜨게 했고, 장년들에게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직시하도록 사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3) 세대를 초월해서 SNS에 매달린다. 왜? 외로워서, 관음증과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려고. 다양한 해석이 있다.
4) 컵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손으로 물을 먹었다. 그러니 다시 컵이 없으면 손으로 물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 물질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기계나 물질 또는 도구 없이도 제 몸으로 살 줄 알아야 한다. 스마트 폰도 마찬가지이다. 거기다 모든 것을 걸면 안 된다. 스마트 폰 없이도 살 줄 알아야 한다.
5) 스마트 폰은 소비하는 컵이나 의자와는 다르다. 그건 관계를 맺는 도구이기도 한다. 그런데 SNS 때문에 사람들의 관계는 더 가벼워지고, 더 외로워졌다.
6) 사람은 원래 고독한 존재이다. 고독은 인간의 본질이다. 본래 고독하게 살고 고독하게 죽는다. 그런데 고독 속으로 들어가면 고독의 한가운데서 채워지는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 도시에서 바쁘게 밀려다니며 일상을 보내는 사람은 이해 못 할 이야기이다.
7) 고독이 자신과의 대화가 되어야 한다. 습관적으로 고독한 시간에 자기 자신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한자로 고독은 외로울 고(孤)와 홀로 독(獨)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강한 사회는 상처 입은 모든 이가 함께 존중받는 곳이어야 한다. 고아나 독거노인처럼 소외된 이들도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엄한 위치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8) 경쟁이 강박과 일상이 된 오늘날, 가족과 둘러앉은 밥상마저 쓸쓸함을 채워주기보다 서러움을 불러 올 때가 많다. 도시에서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떨쳐내기가 참 어렵다. 그렇다고 다 버리고 산 속으로 갈 수 없다. 인간은 원래가 소통하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유교는 관계를 중시하나, 도교는 “천지의 정신으로 왕래하라”고 했다. 고독을 통해 천지天地와 이야기하라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의 행복을 완성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외부에서 추구할 때 길을 잃고 헤맨다. 진정한 대화의 관계가 아니라, 단지 주고받는 관계로 변할 뿐이다. 석가모니가 말하는 보리(깨달음의 지혜)라는 말은 우리가 스스로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너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너무 오래 묻다 보니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고 산다. 모든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를 권한다. 바로 고독을 아는 인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9) 세상을 온전히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은 이미 익숙해지기 전에 바뀐다. 이 직장에 계속 다녀야 할지? 이 장사, 이 업종을 계속 해야 할지? 전전긍긍한다. 나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도 전에 세상은 변한다.
-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자기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 순간을 온전히 느낌으로써 세상에 이미 벌어지고 있던 현상들과 연결된다. 느낌과 앎은 다르다.
- 나우니스(Nowness):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현재가 이어지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시간을 말한다. 순간을 경험한다.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경험한 것이다.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면 모든 사람이 자기 세상을 견고하게 할 수 있다. 그 순간 자신의 내면과 아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현대인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반면 너무 적게 느낀다. 그래 감각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하며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이렇게 느끼는 감각은 천천히 약해져 간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만큼 느낌의 힘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의 답은 하나만이 아니다. 결과의 답도 있지만, 과정의 답도 있다. 살면서, 과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균형이다.
10. 고독의 만족감과 외로움의 목마름
- 우린 가끔 이성적인 사고를 하겠다는 이유로 세상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감각의 촉수를 거둬들이고 있다. 이성도 감각의 조화 속에서 더 사려 깊어질 수 있다. 이성은 브레이크이고, 감성은 액설레이터이다. 감성이 메마르면 이성도 역시 할 일이 없어진다.
- 생각을 멈추고, 침묵하면, 내 안의 생명력이 살아난다.
- 속도의 관성을 끊기가 어렵다.
-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거다.
-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은 다르다. 고독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 불안해지는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최고의 시간이다.
-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슬픔이지만, 고독은 함께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혼자 있음'의 자각이다.
- 결론을 내리기 전에, 서둘러 해석하기 전에 직접 보고 느끼기를 바란다.
- 외로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고독 속에서는 희망이 올라온다.
11. 희망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다. 고독의 시간을 누리며 마침내 희망으로 나아간다. 훌륭한 작가나 혁명가 등의 신념에는 당대의 불평등에 맞서는 핵심 주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웠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의 행동은 바로 고독 속에 벼린 힘이다.
- 세상은 정해진 질서 속에 있지만, 새로운 생각을 일으켜 밀어붙일 때 흔들리며 나아갈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질서는 과거의 습관이다. 혁명의 고독이다. 세상과는 자기 내명과의 눈을 뜨고 그것을 알아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기댈 수 있는 힘이라고 믿겠지만, 모든 개인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의 요구에 맞게 행동하는 것 또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큰 힘과 작은 힘이 서로 맞물려 함께 움직인다.
12) 세상의 질서로부터 고독하게 돌아서는 힘
- 1퍼센트의 반항이 사회의 균형을 잡아준다.
- 한 사회가 균형을 잃고 쏠려 있다면, 과거로 회귀하거나 파시스트적인 억압을 한다면, 거기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며 극단적으로 치닫는 시위도 기울어진 추를 중앙으로 가져오는 충격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 인도장님과 코끼리 이야기: 한 사람 한 사람이 만진 것은 부분에 불과하니 논쟁에서 이겨봤자 결론은 어차피 틀릴 것이다. 그러니 각자가 만진 부분을 교환하며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며 비교적 완전한 코끼리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내 생각을 용감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이면 된다.
- 누구든지 자기 뜻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바로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개인들이 깊이 사고해야 한다. 하나의 답을 주고 토론하게 하고, 약자들에게는 그 답안을 완성하도록 강요받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사고하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고 답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 아예 사회적인 습관으로 굳어져 개인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 분위기에 젖어버리는 일상, 이는 아주 위험하다. 남의 생각에 길들여지면 안 된다. 혼자, 각자 생각해서 작자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가장 무서운 것이 시장과 이에 부응하는 미디어이다. 소비로써 나를 증명하도록 부추긴다. 그래 개인의 사고가 중요한 이유이다. 저항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지금 우리가 대항하고 싸워야 할 대상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지금의 일상의 요소들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체제이고, 그 자체가 바로 권위적인 압박이다.
- 대안이라면? 주류 사회에서 고독하게 돌아서는 것이다. 고독해진다면, 혼자 놀 줄 안다면, 주류 사회의 쏠림을 거부할 수 있다. 그리고 소비형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고독으로 내면의 힘을 단련할 수 있다.
- 주류 사회로부터 떠나 고독의 힘을 단련시킨다. 자기 자신과 함께함으로써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게 된다. 그러면 힘을 기르면, 바깥세상이 계속 변하고 정보가 넘쳐나도 평온하게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벽>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면, 자신의 공포와 죽음을 함께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 고독을 두려워 할 필요 없다. 두려움은 외로움과 황량함을 부른다. 지금 하고자 하는 바로 그 일을 하면 된다. Bon Courage!
13. 우린 지금 시끄러운 일상에서 좀 이탈 해 고독이 필요한 때이고, 많은 이가 고독하게 앉아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의 힘을 길러내어야 전체 사회가 성숙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많이 떼져 다닌다. 카페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 고독은 스스로를 홀로 두며 스스로가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자각을 이루는 자리이다.
- 각자의 고독 속에서 반드시 스스로를 세워내는 존엄을 되찾고, ‘위대한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위대한 사회’가 된다고 나는 본다. 자기 존엄성을 가지면,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주인공으로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다.
- 끝으로, 고독 속에서 나의 존엄성(la dignite)을 되찾자는 장쉰의 인터뷰가 나는 반가웠다. 존엄성을 잃으면, 사람이 이상해진다. 뭐, 우리 ‘가오’로 사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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