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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 산책

'무한 화서'와 '유한 화서'

'화서(花序)'란 말이 있다.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으로 '꽃 차례'라고 한다. 이성복 시인의 시 창작집 중 『무한 화서』란 것이 있다. 화서, 아니 '꽃 차례'는 두 가지이다. '무한 화서'와 '유한 화서'. 후자는 성장이 제한 되며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꽃이 핀다. 전자는 성장이 제한 없이 아래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꽃이 핀다. 유한 화서는 원심성, 무한화서는 구심성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이 무한 화서는 밖에서 속으로 꽃을 피우면서 제한 없이 밑에서 위로 성장하며 무한으로 나아간다. 인간도 검소하며, 늘 내면을 성찰하는 사람이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은 원심력의 속성이 있다. 반면 인간의 본성은 구심력(중력)의 속성이 있다. 욕망은 점점 더 커지고 높아지려 하기 때문이다. 원심력을 타고 자신의 본성을 이탈하려는 욕망을 중심 쪽으로 끌어내리려고 절제하는 태도가 검소함이다. 절제, 검소로 욕망을 제어해야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식물들의 화서, 꽃차례가 알려준다. 그러니까 식물들의 잎이든, 꽃이든 점진적으로 상승하려면 내면으로 들어가 몰입하고 집중하는 구심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사유를 좀 더 끌고 간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 세계를 구축한다. 개념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권위를 갖기 쉽다. 게다가 개념은 그 권위를 타고 무한 상승하여 윗자리를 차지한다. 이 상승을 부추키는 힘을 우리는 원심력이라 한다. 그래서 지식은 무한 분화한다. '나'의 고유성은 나의 몸에 있고, '나'의 마음에 있다. 개념이나 지식은 외부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원심력 같은 것이다. 반면 '나'의 몸과 마음은 중력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욕망도 원심력이라면, 그 욕망의 절제는 구심력이다. 이렇게 분리되는 현상을 좁히는 일이 나를 고독하게 만날 때 이루어진다.

이 분리 현상이 커진다는 것은 내 몸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과 나의 머리가 생각하는 일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중력이 빠지면, 헛도는 '나'가 없는 행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 마음이 지켜지지 않는 독서와 내 몸이 지켜지지 않는 읽기,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작동하지 않는 지식은 항상 나를 배반한다. 자발성(自發性)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의 재미를 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을 진정으로 즐길 수 없다. 즐거움이란 내 마음이 공감을 경험한 후에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의 공간 안에서 일으키는 진동이다. 독서를 통해서 지향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즐거움을 거쳐서 자기가 재발견되고, 재발견된 자기가 다시 쓰기로 확장 될 때, 즐거움은 배가 된다. 그러면서 자기는 더 확장된다. 자기 스스로 운동, 즉 움직임을 화복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게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다. 너무 멀리 왔나? 어쨌든 그래 아침마다 나는 글을 쓴다. 그리고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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