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0.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가을 서리가 아니라, 봄 서리를 아시는 가요? 해가 뜨기 전, 봄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면, 땅 속에서 얼었던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피어난다. 이게 봄 서리다. 흙은 늦가을 서리에 굳어지고, 봄 서리에 풀린다. 김훈은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나는 물의 싹"이라고 말한다. (<자전거 여행 1>) 풀 싹들은 헐거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이 올라온다. 이건 놀라운 생명의 힘이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경이(驚異)이다. 이런 '봄 서리'의 경이로 한반도 평화가 꽃피길 간절히 원한다.
인문학의 시작은 경이에서 시작된다. 깜짝 놀라는 그 순간, 우리는 철학적 사유가 시작된다. 경이는 새로움에 직면할 때이다. 새로움은 일반적으로 생경하다. 그래 인문학은 낯선 풍경을 대면할 수 있는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의 활동으로 등장한다. 이것을 인문학을 위한 '인격적 준비'라고 한다. 이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낯설고 어색한 신호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며, 깜짝 놀라는 내면의 동요를 경험하게 된다. 이게 바로 '경이'이다.
지난 일요일 <예훈농장 2019>에서 난 그 경이를 만났다. 그런데 온 몸이 아프다. 겨울내내 쓰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며 삽질을 했기 때문이다. 시인 처럼 '삽'을 발음을 해 본다. 입술이 예쁘게 모인다. 나는 밭을 파는데 삽을 썼는데, 시인은 사랑을 얻을 때에 삽을 한 번 뜨고, 종국에 닥칠 죽음을 자기 스스로 거두어들일 때 또 한 번 삽을 뜨겠다고 한다. 시인은 삽을 보고, 생의 한 경이를 포착했던 것이다. 시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삽이라는 발성의 쾌감은 후반부의 비장함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심각하지는 않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경이다. 경이가 없다면 기다림도 없다.
이 시는 산문시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산문시는 '주절거림'이기에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는다.
삽/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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