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소리 시대정신(2016/12/28)
2016년 한국 사회를 뒤 흔들어 놓은 태블릿 PC와 미국 언론을 달구고 있는 PC는 다르다. 후자의 PC는 Politically Correct(정치적으로 옳은)의 약자이다.
이 말은 <교수신문>에 실린 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이신 신용좌 교수님의 글에에서 만났다.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을 혼돈하는 현실에서 오늘 아침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몇일 전, 한 친구가 2016년이 다 가기 전에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나간 자리에서, 그만 나는 다른 한 친구와 '불편하게' 논쟁을 벌였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 참아야 하는 게 아니가 하면서. 내가 밥도 사지 않으면서......
차별금지법금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무슬림에 대한 생각,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생각 등으로 이어졌다.
그 때 이런 말을 했어야 하는데, 좋고, 싫음은 감성적 판단이다. 감성적 의미에서는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싫음의 대립이 일어난다.
'정치적으로 옳은, 인권이 고려된, 차별적 편견이 없는' 가치들은 사회적 불의를 개선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가치이다.
우리 사회는 강자가 더 부유해지는 동안 약자는 밥을 굶지만 않아도 된다는 편향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빈부의 양극화를 낳은 사회경제적 갈등으로 인한 계급의식과 근거 없는 지역주의로 인한 차별 앞에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세상 모르는 이의 헛소리인가? 아니면 그냥 부러워해야 할 가치인가?
우리 비스트로에 자주 오는 한 분과 12월 25일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요.
아직까지 오바마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사회는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를 추구하려고 애쓴다. 예컨대, 크리스마스 때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공식적으로는 삼가자는 문화는 다민족국가에서 타 종교인을 의식한다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이자 예의바른 처사이다. 절대 다수인 기독교를 무조건적으로 최우선이라고 하는 대신에 소수 비기독교인의 감성을 '좀 봐주자!'.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 기독교인 대다수는 그것이 싫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옳음도 싫으면 싫다는 반응은 감성적 판단이다.
우리는 트럼프의 모순을 왜 못 읽는가? 그의 독선이 편향적 가치와 합쳐질 때, 우리는 무섭고 어이없는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만나지 않는가?
옳고, 그름의 도덕적 힘이 무너지고 있지 않는가? 당위(옳고. 그름)보다는 방편을 묻고,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묻는 영민한 인간들이 많아지는 사회 안에서 '도덕적 책임'이라는 말은 그 의미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궁핍을 모르는 사람, 자유경쟁이 도덕적이라고 믿는 수퍼리치들은 가난이나 열등함을 죄악시 한다. 그러면 다시 히틀러의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인간을 우열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면 장애인들은 국가경쟁력이라는 말로 '처리'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나온다.
트럼프의 주장,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쓰고 사람들은 다시 '미국을 다시 하얗게'라고 우리는 읽게 된다. 선진국가와 후진국가의 차이는 다양성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나중에는 백인계의 우월감과 인종주의는 예측 불허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인류가 선한 의지로 진화해나간다는 믿음은 맞지 않는 것 같다. 다시 나치즘이 부활하려하니.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인종은 생물학적 차원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하는 것일까? 서용좌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종주의는 생물학적 차원보다는 종교적, 문화적 차이와 민족성의 문제를 표방하는 일종의 사회적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서교수의 걱정을 나도 똑같이 한다. "민족적 정체성과 번영을 위협받지 않으려는 본래적이자 맹목적 저항심과 그에 따른 두려움 같은 것에서 기인하는데, 정치세력이 이를 이용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까 심히 우려되는 것이다."
조금만 고민하면 타인을 향한 불안감은 근거가 없다. 누구에게나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다음 순간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지 알 수없는 나, 나 자신 이외에는 두려운 존재가 없다.
사실 너 없는 나는 없다. 너가 있어 내가 있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람은 자기가 들인 시간만큼의 경험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제 남은 삶은 어느 곳에 자기 시간을 바칠까? 옳은 일을 하는 경험에,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경험에. 나를 위한 시간에 경험을, 아니면 다른 이를 위한 시간에 경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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