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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연대‘는 공화주의 정신이다.

오늘날 이 나라 정치의 근본문제는 정치가들이 ‘주권자’들의 절실한 인간적 혹은 생활상의 요구에 대하여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는 나라에서 선거를 통해 뽑힌 통치자, 정치가들이 국민 혹은 유권자들의 절실한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서도 그들이 임기 내내 하는 일이란 오로지 다음 선거에서의 재선을 위한 궁리와 술책 뿐이다. 유권자들의 절실한 요구를 무시하고 반응을 하지도 않으면서, 또다시 선거에서 이길 궁리를 한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게 지금 이 나라의 정치판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심히 불합리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소선거구 지역구 중심으로 국회의원을 뽑는 제도하에서는 양당체제를 벗어날 수 없고, 양당 소속 정치인들에게는 그들이 ‘정치가 계급’으로서 누리는 특권의 영속화가 늘 최우선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선거는 이른바 망국적인 지역주의와 강력히 결합되어 있다. 지역주의에 깊이 침윤된 선거풍토 속에서는 입후보자의 자질이나 공적에 관계없이 ‘묻지 마’ 투표가 횡행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선거에서 당선 혹은 재선을 꿈꾸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천권자’ 혹은 ‘실력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다. (자신의 지역구 사람들도 아닌) 하찮은 무지렁이들한테 관심을 기울여봤자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거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돈이다. 선거에서 이기자면 우선 지명도가 높아야 하지만, 지명도를 보증하는 사회적 성공, 출세, 업적 등등은 불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돈(혹은 부패한 정신) 없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지식인 사회에서 흔히 운위되는 대의제민주주의의 위기란 별 게 아니다. 오늘날 돈을 가진 자들에 의해 지배·통제되는 선거는 기득권자들의 영구집권을 돕는 메커니즘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정치가 공익이 아니라 (재벌과 부유층, 기득권층의) 사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변질·타락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공화주의 정신의 완벽한 결여이다.

공화주의 정신이란 국가가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공유물이라는 인식에 투철한 정신이다. 비단 물질적인 재산뿐만 아니다. 공화체제는 그 구성원들 사이에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기본적으로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옹호하는 정치체제이다.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려면 금년 3월1일에 퇴임한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예를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재임 중 극히 소박하고 파격적인 생활방식과 지혜로운 국가운영 때문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퇴임 직전에는 한국의 수구언론까지 그에 관한 기사를 썼다).

예를 들어, 그는 대통령관저가 너무 크다고 노숙자들에게 내주고 자신과 아내는 교외의 작은 농가에서 기거하며, 봉급의 대부분을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출퇴근 시에는 관용차가 아니라 오래된 폭스바겐 비틀스를 직접 운전하며, 찾아온 손님들에게는 손수 차를 끓여 내놓곤 했다. ‘정치적 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이런 행동은 실은 그의 공화주의적 신념에 완전히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정치가는 자기가 대표하는 국민들의 다수와 같은 수준과 방식으로 생활을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는 기후변화도, 환경파괴도, 전쟁위협도 아니고, 정치의 위기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정치가는 지위가 높아지면 갑자기 왕이 되려 하고, “붉은 카펫과 자신을 받들어 모시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공화주의 정신을 망각해버린다. 즉 선출된 임시적 공복일 뿐이라는 자각을 결여한 정치가들 때문에 오늘의 정치가 위기에 처했고, 세계가 커다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