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0월 20일)

어제 못다한 노자 <<도덕경>> 제44장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제 우리는 다음 문장을 읽었다. 名與身孰親(명여신숙친) 身與貨孰多(신여화숙다) 得與亡孰病(득여망숙병): 명예와 내 몸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내 몸과 재산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큰 병인가? 다시 말하면, 소유와 나눔 중에 무엇이 더 괴로운 가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이 문장에서, 노자는 우리들에게 성공과 부에 대한 욕망이 결국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를 한 것이다. 명예(名), 돈(貨), 소유(得)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몸을 망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 노자의 생각은 긴 역사 속에서 우리들에게 소중한 등불처럼 마음을 밝혀준다. 예를 들면 여럿이다.
-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는 나이 서른 살에 죽음을 만난다.
- 천하를 차지하고 평생 전쟁터에서 보낸 초나라 항우도 스물아홉 살에 전쟁터에서 죽는다.
-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통일의 기쁨을 다 누리지도 못하고 객사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라가 성공과 부를 누린 사람들의 마지막 외침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명성과 재물 그 자체가 생의 목적인 것처럼 살다가 몸을 망가뜨리는 경우들이 많다. 그보다도 밤낮으로 자기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자기의 체면을 세워 주는가 손상을 끼치는가 혹은 자기의 인간 관계 하나하나가 자기의 경제적 목적에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만 따지다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삶을 살아 가느라 고달프기가 그지없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위 문장은 우리 몸이 명성이나 재산보다 더욱 귀하고 중하니 몸을 해치면서까지 명성이나 재산을 위해 애태우고 감투와 돈을 찾아 신기루 쫓듯 하며 달려가는 그런 부질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노자가 권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 문장에서 "병(病)"은 '힘들고 골치 아프다'는 뜻이다. 소유와 나눔 중에 무엇이 더 힘들고 어려울까? 얻으려면 남의 소유를 빼앗아야 한다. 내 정신과 육체를 바쳐야 비로소 탐욕을 채울 수 있다. 반면, 나눔은 행복한 일이다. 돈을 벌 때 느끼지 못했던 나눔의 행복을 나중에 아는 사람이 많다. 통장에 돈을 쌓아 놓고 지키는 일이 더 골치 아픈 일이다. 성공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베풀 때 비로소 성공의 마지막 퍼즐이 맞추어 진다.
그 다음은 문장은 "是故甚愛必大費(시고심애필대비) 多藏必厚亡(다장필후망): 지나치게 좋아하면 크게 낭비하고, 너무 많이 쌓아 두면 크게 잃는다"이다. 그런 까닭에 애착이 클수록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가지려 할수록 반드시 많이 잃게 된다는 거다. 여기서 "대비(大費)"는 "신(身)"의 재앙이고, "후망(厚亡)"은 "재화"의 재앙이다. 그래 도올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내 몸을 심히 아끼다 간 반드시 생명을 잃게 되고, 재화를 많이 간직하다 가는 반드시 후하게 망해 먹으리라."
마지막 문장은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可以長久(가이장구):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으니 오래오래 삶을 누리게 된다"이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만족(足)을 알고 그치는(知) 것이 내 몸을 살리고, 내 정신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해답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노자의 철학이 소극적이고 허무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주체는 성공한 귀족이거나 권력자이다. 이미 성공이라는 문턱에 다다른 사람에게 하는 경고이다.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큰 탐욕을 보일 때 벌어지는 참사에 대한 경고이다. 소유는 나눔을 통해 빈자리가 비로소 채워진다. 지속(長久) 성공과 생존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니버의 기도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주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화(차분함, 靜)를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勇)를 주시며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智)를 주소서."
<<중용>>에 의거하면, 수신(修身) 방면으로는 지혜(知), 사랑(仁), 용기(勇)를 “3가지 두루 통하는 덕”이라는 ‘3달덕(三達德)’을 배양하고, 니버의 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서양인들은 수신(평온함)을 위해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차분함(靜), 바꿀 수 있는 변화의 용기(勇),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智)를 갈고 닦는다.
'족함을 알아야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를 "살아서 창고에 많이 간직하고, 죽어서 무덤에 많이 간직하면, 살아서는 도둑이 쳐들어올까 염려하고, 죽어서는 도굴될까 근심한다"고 푸는 사람도 있다. 명예와 몸, 몸과 재물, 잃음과 얻음, 그 어느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더 이롭고 더 아름답지 않다.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렁이는 욕심이다. 그 욕심을 그칠 줄 아는 지혜와 균형이 필요하다. 적당히 만족하고 삼갈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재물을 크게 쌓지 않으면 많이 잃는 법도 없다.
욕심을 줄이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멈출 줄 아는 게 중요한 것은 곧 오래가기 위함이다. "가이장구(可以長久)"는 생존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고, 편안함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명예보다 몸-생명이 더 중요하다. 몸-생명을 잃은 뒤 재물이나 명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니 몸-생명을 성히 보존하려면 욕심을 그치고 자족하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가이장구"에서 제7장의 "천장지구(天長地久)" "以其不自生(이기부자생)"이라는 말이 소환된다. 노자는 천지의 모습에서 성인의 행동 준거를 찾고, 당연히 우리 보통 사람은 성인의 행동에서 우리의 행동 준거를 찾는다. '도(道)' 대신 천지(天地)를 말한 것은 천지는 '도'보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천지의 문제를 '영원'으로 말하지 않고, '장구(長久)'로 말하였다. 보통 장구는 시간의 지속을 말하지만, "장(長)"에는 공간적 성격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천장지구"는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로 해석된다.
그리고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부자생(不自生)"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自)를 목적어 보면, 이해가 쉽다. 그러니까"부자생"은 '자아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자기의식 없이 생성한다', '자신의 의지나 욕망에 따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조작하지 않는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삶을 연장키 위해 발버둥치지 않는다. 만물의 생성이 모두 자기로 인하여 이루어진다고 자만하지 않는다는 거다. "생이불유(生而不有, 낳되 소유하지 않음)" 계열의 해석이 가능하다.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것은, 천지는 만물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을 뿐 자기 자신의 사적인 생명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는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능히 장구히 살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노자 이야기는 자생(自生)하지 않기 때문에 장생(長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도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면 저절로 권위를 회복하여 선두에 서거나 자신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자연의 존재 형식이나 운행 원칙이 관계 속에 있으며 그것이 비본질적이라는 데 있다. 좀 어렵다. 잘 읽어야 한다. 관계적이며 항상 변화하고 있고 비본질적으로 되어 있는 세계에서는 '자신'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스스로 가지면서 '자신으로서(자신의 본질 속에서) 존재할 수가 없다.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만을 근거로 하는 행위는 정당성도 없을 뿐 아니라 참된 성과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거다. 이러한 노자적 삶은 소극적이고 모든 이로움을 방관하는 달관한 은자의 것 같지만, 사실은 더 크고 진정한 효과를 기대하는 삶의 지혜이다. 자신의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능히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명예와 재물은 적당한 선에서 그치고, 그 상태에서 안락함과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래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바흠은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탈진해서 죽고 만다. 길을 걷다가 적당한 선에서 그치고 해가 충분히 남아 있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더라면 여생을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음의 여백이 필요하다. 그래 오늘 시는 도종환 시인의 <여백>이다. 욕심보다 여백을 생각하는 하루를 보내고 싶어서 이다.
여백/도종환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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