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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왜', '어떻게' 그리고 '무엇'

1653.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2021년 6월 9일)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그런 의미가 있죠/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말해요."(들국화, <걱정 말아요, 그대>) 걱정을 하지 말아야,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아야 자유롭다.

성철 스님이 말씀 하신 다음은 인터넷을 널리 퍼져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근심 걱정에 대해 가르침을 주신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걱정할 거면 딱 두 가지만 걱정해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걱정하지 말고, 아프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나을 병인가?  안 나을 병인가? ​나을 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안 나을 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죽을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천국에 갈 거 같은가?  지옥에 갈 거 같은가? ​천국에 갈 거 같으면 걱정하지 말고, 지옥에 갈 거 같으면 지옥 갈 사람이 무슨 걱정이냐?"

걱정한다고 우리의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나?  우리의 걱정이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나? 그렇지 않다면 걱정을 멈추어라. 해결될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다른 사람이 나타나 해결해 주거나 상황이 변화되어 해결될 거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많은 문제들 속에 둘러싸여져 있고,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해결된다.

나는 "낫싱 스페셜(Nothing Special)!"라는 말을 좋아한다. 프랑스어로는 "빠 드 스페이시알(Pas de special)!"이다. 류시화 시인은 이것을 한국 말로 이렇게 옮겼다. "큰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인 데도 우리의 마음은 그 하나를 전체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겪는 문제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괴물이 되어 더 중요한 것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걸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고,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이다.

어제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와 이른 저녁부터 와인을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세상에 걱정할 일 없다. 어제 친구들을 만나리라는 전혀 몰랐다. 오후 늦게 약속된 것이다. 나는 걱정 없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며,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며 영혼의 근육을 키워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특별히 걱정을 사서 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앞으로 다가올 5년에 신경쓰기보다는 바로 코앞의 5일에 더 집중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실제 주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몇 년 뒤의 일은 태산같이 걱정하면서 당장의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낸다. 나는 미래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일분 일초 시간을 쥐어짜내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미래도 잘 풀릴 것이다. "개꿈" 아니다.


개꿈/오탁번

평균 수명 채우려면 앞으로 10년,
살아온 날 생각하면
10년이야
눈 깜짝할 사이인데,
참 이상하다
겨우 10년밖에 안 남은 세월이
무한대無限大로 느껴진다
백수白壽하고 싶니?
참 뻔뻔스럽다

그렇다 뻔히 보인다
짧고 굵게!
젊은 날의 숱진 맹세 죄다 까먹고
흐지부지 살아온 나는
앞으로 어느 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또 이럴 것이다
곧 사윌 목숨인 줄도 모르고
무한대로 남아 있는 내 생애가
은하수 물녘까지 뻗칠 거라고
개꿈을 꿀 것이다
뻔하다


몇 일전에 나는 강준만 교수의 칼럼을 흥미롭게 읽고 여러 가지 통찰을 얻었다. 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과 ‘왜'는 가치와 비전의 영역이므로 협치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협치는 사실상 ‘어떻게’의 영역에서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부동산이나 일자리 등과 같은 민생 문제는 대부분 ‘어떻게’와 관련된 것이다." 정치는 '어떻게'를 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나 우리가 하는 어떤 일 앞에서는 '왜'를 먼저, 그리고 '어떻게'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 그 일('무엇')이 훨씬 즐겁기 때문이다. 그 이유와 방법을 아니까 말이다. ‘무엇’, ‘어떻게’ ‘왜’, 가운데 어떤 게 가장 중요한가를 놓고 많은 이들이 여러 말을 남겼다. 물론 정답은 없다. 사이먼 사이넥의 <나는 왜 이 일을 하느가>라는 책은 꿈꾸고, 사랑하고, 열렬히 행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라 한다. 저자에 의하면, 세상과 일터,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우리를 춤추게 하는 근원의 힘, 자신만의 '왜'를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왜’가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글쓰기와 관련된 조언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1970년대 이후 사회과학에서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어떻게’라는 물음만 남았다”고 개탄했는데, 진보적 사상가들은 대체적으로 ‘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임상심리학자 에른스트 푀펠은 “항상 모든 것에 ‘왜’라고 질문하는 이성에 대한 중독증은 그 자체로 질병이 아니라면 편협함의 신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회가 아닌 개인적 차원의 조언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강교수는 평소 현 정권이 ‘무엇’과 ‘왜’엔 강하거나 능하지만 ‘어떻게’엔 소홀하거나 무능하다고 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동안 전 정권들이 '왜'와 '무엇'을 너무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국가 비전이 우선 필요했던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현 정권은 '어떻게'가 부족하여 관료들에게 당했다. 강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행정은 ‘사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에 불과하다는 속설을 확인하면서 분노와 개탄을 쏟아내지 않았을까? 부동산 정책은 일단 ‘욕망에 불타는 시민’을 전제로 삼아야 했다. 물론 공기업 직원과 공무원도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전제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야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역효과’를 예방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이건 대단한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식 중의 상식이 아닌가. 그러나 ‘선의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문 정권엔 그런 상식이 없었다. 시민들에게 선의를 가지라고 해 보아야 소용없다. 다 욕망에 불타기 때문이다."

‘무엇’과 ‘왜’는 가치와 비전의 영역이므로 협치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협치는 사실상 ‘어떻게’의 영역에서 작동할 수 있다. 예컨대, 부동산이나 일자리 등과 같은 민생 문제는 대부분 ‘어떻게’와 관련된 것이다. ‘어떻게’에도 이념과 가치가 끼어들 순 있지만,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한 것들에 숨어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디테일의 완성’을 위해선 귀를 활짝 열어야 하며, 특히 반대편의 의견을 경청해야만 한다. 개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교수의 말을 들어 본다. "‘큰 정부’를 지향하면서 공무원 수를 대폭 늘린 것도 그렇다. 어떻게 기존 공무원 조직문화를 민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게끔 개혁할 것인지 이에 대해서도 적극 논의해야 하건만, 그런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이 또한 ‘어떻게’를 무시하는 버릇 탓이다.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큰 정부’와 ‘공공부문 강화’가 ‘어떻게’에서 실패하면 ‘작은 정부’와 ‘시장 만능주의’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 묻지 않고, 무조건 '어떻게' 따지면 선도력(先導力) 없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다. 인간이 모든 활동의 총체인 문명은 세 개의 층위로 이루어진다. (1) 가장 낮은 층위를 이루는 것이 물건들이다., '무엇(what)'이다. 그것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로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물건은 물건 자체의 역량으로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2) 두 번째 층위가 제도(how)이다. '어떻게'이다. 물건이 나오고 돌아다니는 길을 제도라 한다. 물건은 태어나는 길과 돌아다니는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좋은 물건이 나온다. 이 제도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좋은 제도는 좋은 물건이 등장하도록 보장한다. (3) 세 번째 층위가 좋은 인문학이다. '(why)'이다. 인문학 하나인 철학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고도 한다. 좋은 제도는 좋은 물건이 나오게 하는데, 좋은 제도는 또 좋은 세계관이나 생각의 방식, 즉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서 비롯된다. 인문학은 추상적이다. 좋은 인문학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종합하면, 구체적인 일상의 삶은 좋은 물건으로 보장되고, 구체적인 좋은 물건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좋은 제도가 만들며, 좋은 물건들과 좋은 제도는 추상적인 좋은 인문정신인 철학이 책임진다. 한 사회의 구성원둘의 시선이 물건에만 가 있으면, 후진국, 물건과 제도에 가 있으면 중진국, 물건과 제도와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 모두 가 있으면 선진국이다. 우린 아직 중진국이다. 우리 사회의 격렬한 논쟁들을 보면 아직도 제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의식도 매우 제도 의존적이다. 이를테면, 자녀들을 교육 시키고 싶은 방향은 이런데, 교육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간다고 하는 말이나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데 내 삶이 사회구조 때문에 이리 되었다고 하는 한탄들도 결국은 모두 제도에 깊이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직까지 중진국인 이유는 우리 사유의 높이가 제도까지는 도달했으나 문화나 인문학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종속적인 단계로는 가장 높지만 자유롭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직 우리는 문화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구체적 구성물인 물건과 제도 모두 외부에서 들여왔다. 독립적이기 보다는 종속적인 구조 속에서의 번영과 발전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새로운 도전은 매우 분명하다.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다. 정치적이고 감성적인 독립이 아니라 삶의 독립, 생각의 독립, 과학적이고 찰학적인 높이의 독립이다. 최진석 교수가 강의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강준만 교수의 다음 주장에 크게 동의한다. "분야나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유불급의 원리이다. ‘무엇’, ‘왜’, ‘어떻게’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게 좋다는 뜻이다. ‘무엇’이나 ‘왜’를 앞세우더라도 ‘어떻게’에 실패하면 ‘무엇’이나 ‘왜’의 의미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학문 세계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과 씨름을 해야 하는 정치·행정의 세계에선 더욱 그렇다. 물론 정치·행정도 가치와 비전을 필요로 하므로 ‘무엇’과 ‘왜’를 중시해야 하지만, ‘어떻게’에 실패하면 ‘무엇’과 ‘왜’는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 분야나 상황에 따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