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도 나희덕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우리는 11월에 나희덕 시인을 대전으로 모신다. 그래 내일 저녁부터 그전에 모여 시인의 작품을 읽는다. 난 저녁에 강의가 있어 참석하지 못한다. '웃픈' 현실이다. 옆 동네에서 8회 와인 강의 요청이 들어 왔다. "오네뜨"란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음식의 조화를 체험하며, 와인을 익히고 싶다고 한다. 프랑스 말로 '마리아쥐(mariage)'라 한다. 이 뜻은 '결혼'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실 때, 음식을 위한 페어링(음식과의 조화)에 매우 신경을 쓴다. 마치 우리가 결혼할 때 처럼 여러가지를 따진다. 함께 진행 할 꼬르동 블뢰(Cordon Bleu) 출신의 셰프에게 기대한다. 꼬르동 블뢰는 프랑스에 있는 요리학교이다. 그런데 서울 숙명여대가 그 기관을 사와, 서울에서도 공부할 수 있다. 참고로 꼬르동 블뢰란 허리에 차는 푸른 띠인데, 프랑스에서는 레스토랑 셰프가 그걸 허리에 찬다. 내 공동체를 위해, 비록 공부 모임에는 못가지만, 기여하고 싶어 지난 주부터 나희덕 시인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의 질문을 나는 '지금 내 뒤에서 부는 바람은 무엇인가'로 바꾸어 본다. 등을 돌려보니,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다. 왜냐하면 나의 정신은 이번 가을 학기에 할 인문학 강의, <초 연결시대, 인간을 말하다>로 진행되는 인문독서 아카데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AI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지만 인간인 것은 아니다"(이명호)란 흥미로운 <여시재> 칼럼을 읽었다. 이 칼럼은 이런 질문을 한다. "인공 지능이 인류 최후의 발명품이 될 것인다? 아니면 인류 역사상 등장했던 다른 도구들(불, 바퀴, 증기기관, 컴퓨터)과 같이 인간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그칠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나는 '지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래야 인간 지능과 인공 지능을 구별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미 예일대 교수인 뇌과학자 이대열 교수는 지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능은 새로운 대상이나 상황에 직면하여, 그 의미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합리적인 적응 방법을 알아내는 능력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문제해결 능력이다. 그리고 지능이란 개별 생명체가 진화하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생명체의 몸과 떼어놓을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 본능(스피노자의 용어 Conatus)와 자기 복제 본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진정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되려면 자신을 보호하고 복제하기 위한 존재 자체의 내재적 목적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공지능은 인간에 의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이다.
인공지능은 자신의 주변 상황을 자각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피드백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에 나는 마음이 간다. 잘 모르기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인공지능은 감각기관(몸)이 없다는 한계로 인간 지능을 갖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최근에 인공지능의 강화학습에서 보상을 주면 더 높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논리를 수정해 나가는 피드백 과정을 기분으로 하고 있지만, 그 보상이라는 것도 인간이 정해준 보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 와인과 음식과의 조화를 찾는 감각을 키워 지평을 넓히는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 남는 한 방법이라 본다.
그러나 이 인공지능이 생명공학과 만나면, 인간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은 인문운동가의 생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다시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인터뷰에서 하는 이야기들 중 10가지만 오늘의 시 다음에 참고로 공유한다.
어쨌든 나는, 페이스북의 저커버그처럼, AI로 하여금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의 시처럼,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그 순간 눈을 떴다//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나를 꼭 잡고 있으면 등 위에서 바람이 불어도 내가 뗏목이 될 수 있다.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_시하나 #나희덕 #복합문화공간_뱅샾62
PS
인공지능과 생명 공학이라는 기술의 힘을 얻게 된 인간이 이 기술들로 어떤 삶을 갖게 될까? 이질문에 대답 네 가지를 열거해 본다.
1. 아직은 잘 모르지만, 인공지능이 수십억의 사람을 실직으로 내몰고, 쓸모 없는 계급을 탄생시킬 거라는 건 예측할 수 있다.
2. AI는 독재정권을 출현시킬 수도 있다. 왜? 쓸모 없는 계급의 정치적 욕구 때문일 것 같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욕망 때문에 공산주의가 태어난 것처럼.
3. 개인은 자신의 선택권보다 데이터 알고리즘의 통제를 더 신뢰하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이 마음을 읽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기업이나 시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들의 욕망까지 조작할 수 있으니, 그들로부터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4. 생명공학은 경제적 불평등 계급보다 더 비참한 방법으로 생물학적 불평등 계급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준비하지 않는다면, 역사상 인간이 만든 사회 중 가장 불평등한 사회를 창조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본소득 제도와 디지털 구현에서 소외 받지 않도록, 가상 세계에만 머물지 말고, 현실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채우고, 다른 사람들과 더 따뜻하게 협력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유연한 사고)를 만들어야 한다. 하라리는 생명공학의 힘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소수 엘리트가 생물학적으로 차별화된 계급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다음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1. 혼돈, 변화,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보나 기술을 습득하기보다, 균형이나 유연성을 훈련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명상이나 종교가 여전히 유효하다. 마음의 균형과 유연성을 위하여.
2. 인간이 선택권을 AI에게 완전히 넘겨 버리기 전에 적당한 규제가 필요한가? 아니다 규제할 필요는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규제가 오히려 데이터의 흐름을 저해한다. 그러나 그것을 시장이나 기업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대중이 함께 접근해야 한다. 이 말은 좋은 규제를 만들기 위해서 정부와 대중이 신기술을 이해하고, 산업계와 함께 협력해서 방안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3. 기술에 통제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목적 달성을 위해 기술을 부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지만, 사용 목적 자체를 기술에 명령받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러려면 항상 물어야 한다. 질문을 하여야 한다. 답을 찾으려고만 하지 말고. 예컨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 기술이 우리의 생[삶]을 납치하면, 우리는 기술의 노예가 된다. 기술이 우리 마음을 통제하는 쉬운 예가, 페이스북이나 유투브가 보여주는 개, 고양이 사진만 보다 몇 시간이 훌쩍 간다. 시간 낭비한다. 예를 들면,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내가 사용 목적을 정확히 인지하고 원하는 정보만 얻고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의 편리함을 이용할 뿐이다. 질문하여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질문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4. 미래가 걱정되는가? 우리는 현실성 없는 우려도 있지만, 정작 우려해야 할 것에 대해서 태평한 경우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능과 의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개발한 것은 문제 해결 능력 중 지능에 관한 것이다. 고통이나 쾌락을 느끼는 감정과 의식 부분은 인공 지능에서 전혀 개발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감성 지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예술을 알아야 한다.
5. AI는 인류 소수에게는 힘을 주지만, 다수에게는 힘을 뺏을 수 있다. 가령 섬유 노동이나 통역, 기자라는 직업은 컴퓨터가 감정 없이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이 개입되어야 하는 일자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직자이다.
6.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합쳐서 충분히 19세기 산업혁명과 같은 우리의 미래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경제 전반이 바뀔 확률이 높다. 산업혁명 당시에 뒤처졌던 중국, 한국 등이 산업 강대국들에 침략당했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4차산업 혁명을 우리는 충분히 받아들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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