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8월 25일)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나는 내 삶의 만트라로 삼고 있다. 이 말은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分數)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이란 뜻이다. 자기 분수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만족하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거다.
나의 만트라로 늘 외우는 문장은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을 알자'이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격이 높은 덕망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잣대로 오만(傲慢)에 빠지거나 자만(自慢)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나 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삶의 아름다운 향기가 풍긴다. 이렇듯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야 말로 '멋진' 삶이 아닐까?
‘안분지족’은 노자 <<도덕경>> 제44장의 다음 문장을 소환한다.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可以長久(가이장구)" 이 말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으니 오래오래 삶을 누리게 된다'이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만족(足)을 알고 그치는(知) 것이 내 몸을 살리고, 내 정신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해답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노자의 철학이 소극적이고 허무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주체는 성공한 귀족이거나 권력자이다. 이미 성공이라는 문턱에 다다른 사람에게 하는 경고이다.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큰 탐욕을 보일 때 벌어지는 참사에 대한 경고이다.
소유는 나눔을 통해 빈자리가 비로소 채워진다. 지속(長久) 성공과 생존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니버의 기도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주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화(차분함, 靜)를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勇)를 주시며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智)를 주소서."
<<중용>>에 의거하면, 수신(修身) 방면으로는 지혜(知), 사랑(仁), 용기(勇)를 “3가지 두루 통하는 덕”이라는 ‘3달덕(三達德)’을 배양하고, 니버의 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서양인들은 수신(평온함)을 위해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차분함(靜), 바꿀 수 있는 변화의 용기(勇),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智)를 갈고 닦는다.
'족함을 알아야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를 "살아서 창고에 많이 간직하고, 죽어서 무덤에 많이 간직하면, 살아서는 도둑이 쳐들어올까 염려하고, 죽어서는 도굴 될까 근심한다"고 푸는 사람도 있다. 명예와 몸, 몸과 재물, 잃음과 얻음, 그 어느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더 이롭고 더 아름답지 않다.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렁이는 욕심이다. 그 욕심을 그칠 줄 아는 지혜와 균형이 필요하다. 적당히 만족하고 삼갈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재물을 크게 쌓지 않으면 많이 잃는 법도 없다.
욕심을 줄이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멈출 줄 아는 게 중요한 것은 곧 오래가기 위함이다. "가이장구(可以長久)"는 생존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고, 편안함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명예보다 몸-생명이 더 중요하다. 몸-생명을 잃은 뒤 재물이나 명예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니 몸-생명을 성히 보존하려면 욕심을 그치고 지족 하라 고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가이장구"에서 제7장의 "천장지구(天長地久) 以其不自生(이기부자생)"이라는 말이 소환된다. 노자는 천지의 모습에서 성인의 행동 준거를 찾고, 당연히 우리 보통 사람은 성인의 행동에서 우리의 행동 준거를 찾는다. '도(道)' 대신 천지(天地)를 말한 것은 천지는 '도'보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천지의 문제를 '영원'으로 말하지 않고, '장구(長久)'로 말하였다. 보통 장구는 시간의 지속을 말하지만, "장(長)"에는 공간적 성격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천장지구"는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로 해석된다.
그리고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부자생(不自生)"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여기서 "자(自)"를 목적어 보면, 이해가 쉽다. 그러니까 "부자생"은 '자아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자기 의식 없이 생성한다', '자신의 의지나 욕망에 따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조작하지 않는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삶을 연장키 위해 발버둥 치지 않는다. '만물의 생성이 모두 자기로 인하여 이루어진다고 자만하지 않는다'는 거다. "생이불유(生而不有, 낳되 소유하지 않음)" 계열의 해석이 가능하다. 천지가 '장구' 할 수 있는 것은, 천지는 만물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을 뿐 자기 자신의 사적인 생명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는 자기 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능히 '장구' 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는 자생(自生)하지 않기 때문에 장생(長生)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인간도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면 저절로 권위를 회복하여 선두에 서거나 자신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자연의 존재 형식이나 운행 원칙이 관계 속에 있으며 그것이 비본질적이라는 데 있다. 좀 어렵다. 잘 읽어야 한다.
관계적이며 항상 변화하고 있고 비본질적으로 되어 있는 세계에서는 '자신'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스스로 가지면서 '자신으로서(자신의 본질 속에서) 존재할 수가 없다.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만을 근거로 하는 행위는 정당성도 없을 뿐 아니라 참된 성과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거다. 이러한 노자적 삶은 소극적이고 모든 이로움을 방관하는 달관한 은자의 것 같지만, 사실은 더 크고 진정한 효과를 기대하는 삶의 지혜이다. 자신의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능히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명예와 재물은 적당한 선에서 그치고, 그 상태에서 안락함과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래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바흠은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탈진해서 죽고 만다. 길을 걷다가 적당한 선에서 그치고 해가 충분히 남아 있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더라면 여생을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탁족(濯足)' 대신 물이 고인 황토 길을 걸은 사진이다. '탁족'은 전통적으로 선비들의 피서법이다. 선비들은 몸을 노출하는 것을 꺼렸으므로 발만 물에 담근 것이다. 그러나 발은 온도에 민감한 부분이고, 특히 발바닥은 온몸의 신경이 집중되어 있으므로 발만 물에 담가도 온몸이 시원해 진다. 또한 흐르는 물은 몸의 기(氣)가 흐르는 길을 자극해 주므로 건강에도 좋다. 음식이나 기구로 더위를 쫓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더위를 잊는 탁족은 참으로 선비다운 피서법이다.
'탁족'은 피서 법일 뿐만 아니라 정신 수양의 방법이기도 하다. 선비들은 산간 계곡에서 탁족을 함으로써 마음을 깨끗하게 씻기도 하였다. '탁족'이라는 용어는 <<맹자(孟子)>>의 “창랑의 물이 맑음이여 나의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림이여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한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굴원(屈原)의 고사에서 유래한 이 구절은 물의 맑음과 흐림이 그러하듯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의 처신 방법과 인격 수양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부터 '탁족'은 문사들과 화백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탁족/김원룡
분수대로 살면 욕먹을 일 없고
만족할 줄 알면 절로 한가롭다.
분수를 모르니 욕을 먹는 거고
매사 만족을 못하니 허둥대는 거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면
삶이 풍요롭기보단
더 허허로워진다는 이야기이다.
안분신무욕 安分身無辱
지족심자한 知足心自閑
굴원 이야기는 이렇게 전해진다. 굴원이 죄 없이 추방을 당해 강가나 연못가를 거닐며 슬픈 노래 읊조리니 얼굴은 시름겨워 초췌해지고 몸이 수척해 있었다. 어부가 이를 보고 물어 말하길.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父) 아니신가요? 이런 곳엘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굴원이 대답하여 말을 하기를, "온 세상 모두가 흐려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하고,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은 정신 깨어 있어서 이렇게 추방을 당했소." 어부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을 따라 나가니 세상사람 모두가 흐려 있다면 왜 그 진흙을 휘젓고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으며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왜 그 술지게미를 먹고 薄酒(박주)를 마시지 않고는 무슨 까닭으로 깊은 생각과 고상한 행동으로 스스로 추방을 당 하였소? 굴원이 이 말 듣고 대답하였다. "내 일찍 이런 말 들은 적이 있네. 새로 머리 감은 이는 갓(모자) 먼지 털어 쓰고, 막 목욕을 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고 하였네. 그러니 어찌 이 깨끗한 내 몸으로 저 더러움을 받을 수 있겠 소? 차라리 상강에 뛰어들어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낼 지 언정 어찌 이 희고 깨끗한 내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쓴 단 말이요?"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돛대를 올려 떠나며 노래하길 '창랑의 물결이 맑을 때라면 이 내 갓끈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결이 흐릴 때라면 이 내 발이나 씻어보리라.' 어부는 마침내 떠나가고 굴원은 다시 그와 더불어 말하지 못하였다. 창랑의 물이 맑은 때란 치세를, 창랑의 물이 흐린 때란 난세를 의미한다. 그리고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의관을 정제하고 정치와 사회에 적극 참여한다는 뜻이고 발을 씻는 다는 것은 은거를 의미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 가? 맑은 정신으로 살기가 쉽지 않다. 발을 씻어야 할 모양이다.
중국 고사 하나 더 공유한다. 옛날 중국 요(遼)나라에 허유(許由)라는 현명한 성인(聖人)이 있었는데, 요임금(遼王)은 자신보다 훌륭한 허유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하려고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해와 달이 떠 있는데 횃불을 든다는 것은 웃음거리고, 비가 오는데 밭에 물을 주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이 나라에는 허유라는 성인이 있는데 내가 임금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허유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 주겠노라.” 허유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 도리어 그 말을 들은 귀가 더렵혀 졌다며 흐르는 계곡물에 귀를 씻었다. 마침 허유를 찾아왔던 친구 소보(巢父)는 허유의 말을 듣고 귀를 씻은 물에 자신이 몰고 온 소의 입이 더럽혀질까 봐 두려워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그림이 <허유세이도(許由洗耳圖)>이다. 지금 우리 언론은 너무 이상한 말들을 해서 귀를 씻게 다는 사람들이 많다.

허유는 '평소 새들은 숲 속에 둥지를 지어도 나뭇가지 하나만 족하고, 큰 짐승이 강물을 마신다 해도 배가 차면 그만이라는 지족(知足)의 도리를 가르쳤고,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고 머무를 줄 아는 ‘지지불태(知止不殆)’와 자신의 분수를 알고 만족하면 평안하다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지혜를 갖추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존경받는 현명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생활 수준이 있다. 자신의 신분과 정도에 맞게 살고 행동하는 것이며, "분수"의 '분(分)'은 '몫'이란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고 자기 형편과 처지가 다르다. 형편과 처지에 맞게 사는 것은 제 분수를 아는 것이다. 균형감을 상실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감이 지나치거나 욕심이 많아서 이다. 자신감이 지나침은 오만이 되고, 욕심이 많으면 과욕이 되어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옛날 한 나그네가 날이 저물어 여인숙에 머물게 되었는데, 여인숙 주인이 부인을 둘이나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한 여자는 매우 미인이고, 다른 여인은 못생긴 여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못생긴 여자가 주인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잘생긴 여인은 오히려 박대(薄待)를 받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나그네는 주인에게 물었다. “여보! 주인 양반, 내가 볼 때 그 여자는 못 생겼는데, 어찌 잘 생긴 저 여자보다 당신의 사랑을 더 받고 있으니 궁금하오.” 그러자 여인숙주인은 “저 여자는 미인은 틀림없는데, 스스로 미인 인체 하기 때문에 나는 저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모르겠고, 그 여자는 얼굴은 못 생겼지만 제 스스로 못난 구석을 알고 처신하기 때문에 못생긴 것이 오히려 예쁘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가끔 얼굴값 한다고 시건 방을 떠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지위가 좀 높다고 어깨에 힘을 주기도 하며, 교만한 눈빛으로 남을 무시하는 사람, 별로 떳떳하지 못한 돈푼이나 있다고 우쭐대는 사람도 있다. 오만과 겸허(謙虛), 겸손(謙遜)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려는 태도를 말한다.
‘안분지족’과 비슷한 성어로, 가난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있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비 오는 날/천상병 (0) | 2023.08.27 |
|---|---|
| 신발론(論)/마경덕 (0) | 2023.08.27 |
| 박수소리 시대정신 (0) | 2023.08.26 |
| 가을/함민복 (0) | 2023.08.26 |
| 필링(peeling) 인문학 (0) | 2023.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