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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삭힌 고추/노희정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행복은 성취가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적이며 독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최선이다.

어제는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래 오늘 아침은 머리가 아프다. 날씨마저 6월 초인데, 8월의 한 낮 같다. 세상이 어수선하다. 그냥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햇살 좋은 발코니에서" "삭힌 고추"를 사랑하는 사람과 "씹고 싶다." 오전에 주말 농장에, '미인'팀들과 갔더니, 풀들이 밭을 점령했다. 풀들은 자기 할 일을 쉬지 않고 했던 것이다. 지난 사진, 시 그리고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그 풀들에게서 나는 최선(最善)을 보았다. 오늘을 위한 최선의 전략이란 가장 좋은 하루가 되도록 새로운 판을 짜자는 것이다. 전술이 아니라, 전략이다. 전술은 그 판 안에서 노는 것이라면, 전략은 판까지도 바꾸는 일이다. 나는 코로나-19 이후에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위해 최선의 전략을 짜고 있는 중이다.

전략과 전술은 다르다. 전술에서는 일등을 추구하지만, 전략에서는 최고를 일류라고 한다. 일등이 고만고만한 데서 이기는 거라면, 일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뚝 서는 거다. 일류는 판을 새로 짤 줄 아는 것이다. 도전과 모험에서 나온다. 그냥 낙오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류는 지식을 생산하고, 일등은 지식을 수입하고 이식할 뿐 생산하지 못한다. 지식 생산이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사회의 문제를 파악해 이를 수정해가는 과정이다. 윤리적 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지식인의 타락은 결국 지식 생산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류는 어떤 방면에서 첫째가는 지위나 부류이고, 일등은 으뜸가는 등급일 뿐이다.

다시 '최선'이라는 말로 돌아온다.  최선을 말하려면,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를 흥분시키는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만일 나에게 감동이 없다면, 내가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침체(沈滯)일 뿐이다.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 때만 행복한 순간이 아니다. 하루를 최선으로 살아가면 행복한 일이다. 무엇이 되면 존경만 받는 것이 아니다. 존경과 비례하여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요즈음 그런 예들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좋은 집, 좋은 농장은 노동, 시간 그리고 돈을 항상 요구한다. 행복은 성취가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적이며 독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최선이다.

배철현 선생한테 배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스 윤리학』에서 말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행복이 아니라, 최선이다.  에우(eu)란 '적재 적소, 알맞은, 적당한'이란 말이라 한다. 그러니 '에우'는 자신이 있는 적당한 장소에서 자신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승화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그것이다. '에우'는 나라는 실존적인 존재에서 시작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최선이란 나의 실존적 존재, 내 환경들 속에서 나오는 최적을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환경에 매몰되어 오만해 지지 않는 일이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수많은 세계의 일부라고 여겨야 한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한 경험을 유일한 세계로 주장하기 쉽다. 여기서 오만이 나온다. 그 세계가 매력적이고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해도, 그것은 편견이며 무지일 수밖에 없다. 내 입장을 너머 다른 이의 입장이 되기를 수련해야 한다. 종합하면, '에우' 즉 최선이란 내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살지만,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심지어는 초월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적화된 전략을 짜고 그것에 몰입하는 노력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재소자처(在所自處)'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처한 장소나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태도이다.

나는 아직도 초조해 하고, 허겁지겁 댄다. 그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을 보며,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삭힌 고추"처럼, 좀 더 나를 삭혀야 겠다고 다짐한다. 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오늘부터 복합와인문화공간 <뱅샾 62>도 약간의 변신을 한다. 시원한 월드 맥주를 준비하고, 또 다양한 종류의 치즈와 돼지고기 가공 요리, 즉 샤르뀌트리( charcuterie)들을 냉장 쇼 케이스에 진열할 생각이다. 제목은 '직접 행동'이다. 손님이 직접 갔다 먹는 것이다. 그리고 격주로 문화 행사를 할 생각이다. 다음 날에는 <몰도바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몰도바 와인을 마시며, 몰도바 음악을 듣고 몰도바 춤을 배울 기회를 가질 생각이다. 우리 동네에는 몰도바에서 시집 온 분이 계시다. 그리고 몰도바 와인 수입업체가 서울에서 내려 온 단다.

삭힌 고추/노희정
                
아삭아삭 씹힌다
언니의 삼십 년 세월이
시어머니 모시고 세 남매 낳아
가난한 가정을 꾸려 온 넷째 노서운 언니
찌든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만지작거린 고추
시집살이처럼 시큼하고
알뜰한 살림처럼 짜고
올망졸망 가족사랑처럼 달콤하게 간식처럼 먹던 고추
넷째 언니의 삶을 식초 간장에 푹 삭힌 고추
한때 풋고추처럼 싱싱했을 언니의 푸릇푸릇한 청춘
한 시절 파랗던 고추가 이제는
항아리 속에서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설거지하고 서 있는 언니의 모습은
짜디짠 눈물의 소금기에 푹 절여져 있다
셀 수 없는 긴 세월
언니의 삶도 갯물에 조금씩 씻기어 갔다
푹 삭힌 고추를 꺼내
얼마 전 평생 걸려 지은 집
햇살 좋은 발코니에서
두 내외는 정답게 씹고 있다

지난 6월 6일 아침에 이어, 오늘 아침 포스트 코로나-19에 대해 이야기 하는 제러미 리프킨을 다시 만난다. (2) 지난 번 글에서 제러미 리프킨이 말하는 3차 산업혁명(우리에게는 4차 산업혁명)은 글로컬(glocal)을 위한 인프라라고 주장하였다. 글로컬화(지역 중심 세계화), 생물지역(bio-regional) 거버넌스 (인간만이 아니라 지역 생태계 전체를 책임지는 통치)이다. 3차 산업혁명 인프라는 분산되고 개방적이며 투명하고 수천 만명에게 확장되는 인프라이다. 여기서는 500개의 주요 글로벌 기업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주역으로 활동한다.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인터넷으로 이루어졌다. 45억 인구가 인터넷에 참여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같은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이용해 뉴스와 지식, 엔터테인먼트를 공유하듯 바람과 태양을 함께 누린다. 예를 들면, 수백만명이 협동조합을 이뤄 디지털화된 에너지를 인터넷으로 대륙을 가로질러 다른 이들에게 보낸다. 여기에 전기 및 연료전지 차량으로 움직이는 디지털 이동 물류 인터넷이 통합되고 있다. 그리고 차량은 자율적이 되고 있다. 가까운 시기에 우리 주변에서 쉽게 이런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어렵다. 요약하면, 패러다임이 커뮤니케이션, 에너지 원천 그리고 물류 이동성에서 바뀐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인터넷으로, 에너지 혁명은 재생 에너지, 이동 혁명은 전기 및 연료전지 차량이다. 게다가  이 모두는 사물 인터넷(IOT)로 다시 인터넷으로 다시 연결된다. 건물마다 센서가 장착되는데, 공장, 창고, 집 스마트 차량에도 장착돼 데이터를 수집한다. 앞으로 10년안에 글로벌 사회는 센서를 장착한 사물인터넷과 연결될 것이다.  3차 산업혁명(리프킨의 말, 우리 식으로 하면 4차 산업혁명)은 세계를 수십억, 수조 개의 센서로 연결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정부가 사물인터넷을 지배하지 않고 사람들을 감시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해결책의 하나로 인프라는 공공재이니까 지역 사회가 구제하고 통제해야 한다. 기업이나 중앙 정부가 하면 안 된다. 지난 40년 동안 신자유주의 속에서 우리는 규제 해제와 민영화를 강요 받았다. 기업들이 민영화를 요구하는 논리는 경쟁이 없으면 게을러져 혁신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 민영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일상을 잘 들여 다 보면, 철도, 우편 서비스, TV 송출 또는 상하수도 시스템들이 잘 돌아간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시장에서 돈 벌 기회가 부족한 걸 깨닫고 정부 인프라를 수익성 좋은 다음 단계 목표로 설정했을 뿐이다.

지금 세계를 둘러 보면, 특히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 공공 인프라 자신은 뜯겨져 나가고 있다. 자본가들은 공공 인프라가 망가져도 보수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익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공공 인프라는 반드시 지역 의회, 지역 시민 사회, 지방 자치단체에 의해 공공재로 통제되고 공공의 뜻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런 것을 지역 공동체의 자치 역량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욱 우리의 일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지역적이어야 한다.

이번 코로나-19나 홍수, 가뭄, 산불 태풍 같은 기후 재난이 올 때, 중앙 정부나 지방 정부 혼자 해결할 수 없었다. 전체 공동체가 협력하는 더 수평적으로 분산된 새로운 통치가 요구되었다. 그래 리프킨은 '피어 어셈블리(peer assembly)'를 주장한다. 이 말은 참여자가 동일한 자격을 갖는 동배(同輩, 나이나 신분이 서로 같거나 비슷한 사람) 의회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는 실패하고 있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회 기관과 단체들이 정부와 손잡고 모이는 '피어 어셈블리'가 표준화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리프킨은 이런 것을 '피어 민주주의'라 한다. 우리 모두의 의회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처럼 모든 성인이 일정 기간 잠깐 씩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방식이다. 이는 정부가 관리하지만 정부의 확장이므로 전체 커뮤니티가 자신들의 미래에 관여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유럽 발 '그린 뉴딜'이 흥미롭다. 기후변화에 대응할 방안으로 그린뉴딜이 지역에서부터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뉴딜이란 새로운 정책이란 말이다. 그런데 딜이란 단어는 '정책' 외에, '분배하다' 그리고 '몫'이라는 의미도 있다. 뉴딜은 '새롭게 분배 한다'는 뜻에서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체계를 다시 짜는 것이며 그것이 루스벨트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채택한 뉴딜의 근본정신이다. 뉴딜은 인프라 구축과 함께 노동권, 사회보험 등의 정치이상을 제도화했다. 이처럼 그린 뉴딜도 공정한 분배,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가치가 필요하다. 경제관료들이 경기부양과 일자리정책으로 비대면 경제 위주의 ‘한국형 뉴딜’을 내놓자 문재인 대통령은 그린 뉴딜을 주문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이런 중대한 기로에 있는데, 일부 언론이나 정치인들은 딴전이다. 그리고 북한은 남한에 적대적이다.

야만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편하고 배부르면 그만이다. 후세의 미래는 안중에 없다. 문명은 내일을 생각한다. 당장 불편하고 힘들어도 미래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내한다. 코로나-19 위기 시대에 필요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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