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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생/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8일)

이런 저런 일들을 정리했더니, 일상이 퍽 단순해 졌다. 세상은 시끄러운데, 나는 조용하다. 내가 원래 원하던 삶이었다. 나는,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러려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로부터 필요한 것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적게 가지며 욕심을 양심으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가난 하라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살자는 것뿐이다. 적게 가졌다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다. 그러려면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에 근육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많이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일은 자동차가 제자리에서 공회전을 하듯이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면서 기름만 태우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느라 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이가 아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으로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일상을 방해 받을 정도로 지나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절하자는 것이 우선이다. 나를 좋아하고 싫어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그 사람의 자유이다. 적어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모든 사람에게는 친절할 수 있다. 허름한 옷에, 번뜻한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자신이 한 따뜻한 한 마디를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차에 좋은 옷을 입고, 돈이 많거나 좋은 직장을 가졌거나 훌륭한 일을 한다고 해도, 다른 이의 단점만을 들추어내며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다. '너는 너의 노래를 불러라! 나는 나의 노래를 부르리라!'

▪ 내가 처한 환경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함으로, 그만큼  활기차고 건실하게 산다.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말고, 내 수고로 살아간다.
▪ 네 처지에서 욕심이나 허세 부리지 않고 자유롭고 차분하게 살아가며 행복하게 질 지낸다.
▪ 초조해 하거나 조급할 필요 없다. 바라는 것을 줄이면 된다. 그러면 두려울 게 없다. 자유로워야 한다. 조르바처럼, 어느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조르바는 고용되어 있지만 자본주와 동등하다. 대신 받은 대우 이상으로 임무를 완수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삶에 충실했다. 과거와 미래는 그에게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싶은 것을 한다. 그리고 모든 자연의 변화와 삶에 경외감을 느낀다. 바라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과거와 미래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두려워할 거리가 없다. 그냥 현세적, 현실적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래야 자유롭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릴케의 <인생>이란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즐겁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다. "꽃잎을 모은들 그것이 얼마나 갈까. 아이들처럼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인생은 족하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쥐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 앞에서는 헛것들일 뿐이므로." (은미희 작가)

인생/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곳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맞이하라
길을 걷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의 선물을 받아들이듯

아이는 꽃잎을 모아 간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카락에 행복하게 머문 꽃잎들을
가볍게 떼어내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맞이하며
새로운 꽃잎으로 손을 내밀 뿐

어제 약속했던 것처럼, 이제 산상수훈(山上垂訓)의 팔복(八福, beatitude)" 이야기를 공유한다. 이 것은 <마태복음>  5장 3-7절에 나오는 거룩한 말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경의 신약성서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는데, 그 것은 '주님의 기도(주 기도문)'와 '산상수훈의 팔복'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다들 고민한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한 답을 던지신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을 위한 8가지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 여덟 가지는 관념적이거나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구체적인 강령(綱領)이다. '팔 복'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팔복의 증표'로 살고 싶다. '팔복'을 영어 'Beatitude'라 한다. 이걸 풀면, "Be(존재)+Atitude(태도)"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그것을 마주한 인간의 역량을 측정하는 시험(試驗)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중립적이다. 그것들은 행운이고 동시에 불행이다. 그것들은 희망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건-사고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것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태도(態度)는 곰(熊)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오늘 이 '팔복' 중 세 가지만 공유하고, 나머지 다샛 개는 내일 공유한다. 그 이유는 산상수훈의 '팔복'중 4-8복은 맹자가 말한 '4단(端)+1=5행(인의예지신)'으로 바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제 4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의 문제는 '의(義)'로, '정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맹자 식으로 말하면,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 반대로 의로운 사람은 그 자체로 흡족하다. 그 반대가 찝찝함이다. 양심이 다 말해준다.
▪ 제 5복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의 문제는 '인(仁)', 즉 자비, 아니 사랑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제 6복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의 문제는 '예(禮), 예절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제 7복인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의 문제는 지(智), 지혜의 이야기,
▪ 마지막으로 제 8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의 문제는 신(信), 믿음의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제1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내 삶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돈을 통해, 직장을 통해, 가족을 통해, 명예를 통해 그걸 구축한다. 그리고 안전장치가 버텨 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다. 궁극적 안전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다. 그게 영적인 가난의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영적인 가난'의 태도는 이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려고 하는 거다. 내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이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를 누리는 거다. 자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무위적 삶을 살려는 자세이다. 내가 인위적으로 나의 안전을 구하지 않고, 자연에 맡기고 의지하면서 살려는 태도이다. 스스로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런 자세가 나온다.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의 자세 문제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기보다는 자연의 힘에 맡길 줄 아는 자이다.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그 일 자체가 돌아가는 것을 볼 줄 아는 것이다.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여유 있고, 지혜롭게, 넉넉하게, 잘 살 수 있게 된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제2복: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픔 앞에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 없는 것일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위로를 받고 의지하고 싶을 만큼 힘들다는 말이다. 문제는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할까 이다. 하느님이 위로를 해주시기 때문이다.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슬픔의 끝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위로는 슬픔의 크기와 비례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극심한 슬픔이 닥쳐도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빗 속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가 하는 것이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류시화 시인에 의하면,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 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이다.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기 때문이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축복이라는 영어 blessing은 프랑스어 blesser에서 왔다. 프랑스어 blesser는 '상처 입다'란 뜻이다.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땐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류시화) 멋진 문장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그는 위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3복: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난 '온유(溫柔)'란 말을 좋아한다. 온유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다. "온화", "부드러움" 다 내가 좋아하는 가치이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자신을 열고 받아들인다. 온유하다는 말을 연약하다는 말로 인식되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온유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유하다는 말은 약하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 일상에서 온유한 삶은 '내려놓음'에서 비롯된다. 내려놓음은 나를 비우고, 주님께 맡기는 삶의 결단이다. 부드러운 것은 따뜻하여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다. 생각에 부드러움이 스며들면 얼굴이 너그러워진다. 감추어도 저절로 피어나는 넉넉한 미소가 핀다. 고향의 저녁 연기처럼 아늑한 어머니 얼굴이 된다. 온유함을 잘 보여주는 것이 물이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고, 비어 있는 곳에 채워지고, 부드러운 곳에 스며든다.

"온유'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부드러움(柔)'을 읽어야 한다.  "온유"와 관련된 노자의 일화를 공유한다. '치망설존(齒亡舌存)' 이야기이다. 임종을 앞둔 노자의 스승 상용이 그를 불렀다. 그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였다. 상종이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네 혀는 아직 그대로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빨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게 무슨 까닭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혀가 아직 그대로인 것은 그것이 부드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빨이 빠지고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같다." 결국 '온유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나머지 다섯 가지 "복"은 내일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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