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5월 18일)

내가 아는 곡인무영 스님의 담벼락에서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만났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어" "대신 … 애써 해" 콩나물을 다듬으시면서 할머니가 하신 말이라 한다. 그래 실 같은 봄비가 내리는 한적한 월요일 오후였던 어제, 나는 황산벌에 있는 지인의 별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각자 와인을 한 병 씩 가지고 와, 주님을 모셨다. 밭둑의 검은 비닐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했다.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산양리 일대이다. 영험한 계룡산 줄기가 연이어 둘러싸고 있다 하여 연산(連山)이라 부른다. 우리는 봄비를 '먼지잼' 또는 '는개비'라 부른다. 겨우 먼지가 날리지 않을 정도의 비라는 표현이다.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는 뜻이다. 함께 하신 교수님은 한시를 두 개나 읊으셨다.
중국 당시인인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 "반가운 비가 시절을 알아(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봄이 되니 내리네(當春乃發生, 당춤내발생)/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만물을 적셔주며 아무런 소리도 없네(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 우리는 "윤물(潤物)하며, 세무성(細無聲)하는 봄비의 모습을 느껴보았다. 비가 너무 가늘어 소리가 없는 듯하지만 귀를 간지르며 들려왔다. 봄비의 특징이다. 만물을 적시되 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세상에 생명수를 주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는 것을 우리는 봄비로부터 배워야 한다.
계룡산 줄기가 이어지는 연산들은 안개 모자를 쓰고 위엄(威嚴)하게 우리들을 굽어 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동공자 최충의 시를 이어 하 편 더 읊으셨다. "뜰에 달빛 가득하다 촛불 켜지 마라(滿庭月色無煙燭,만정월색무연촉)/자리에 산경치 들어오니 손님 청하지 마라(入座山光不速賓, 입좌산광불속빈)/거기에다 솔 거문고 멋대로 타니(更有松弦彈外譜,경유송현탄외보)/내가 누리는 이 소중함 남에게 알릴 일 없네(只堪珍重未傳人, 지감진중미전인)"
봄비 이야기를 좀 더 해본다. 봄비는 봄철에 오는 비이지만, 특히 조용히 가늘게 오는 비를 말한다. 빗방울의 크기는 온도와 습도에 좌우된다고 한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여름에 내리는 장대 비와 달리 봄비는 새순을 촉촉하게 적시는 보슬비다 주로 내린다. 빗방울 크기가 작다 보니 땅으로 떨어지는 속도도 느려지면서 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것이다. 농사를 중시했던 우리들에게 봄비는 아주 귀한 손님이었다. 몇 가지 봄비와 관련된 속담을 나열해 본다. (1) 봄비는 쌀 비이다. 건기인 봄철에 비가 넉넉히 오면 그 해 벼농사 짓는데 수월하여 풍년이 든다는 뜻이다. (2) 봄비가 많이 오면 아낙네 손이 커진다. 봄에 비가 많이 오면 풍년이 들게 되므로 씀씀이가 커지고, 특히 아낙네들도 헤프게 쓴다는 뜻이다. (3) 봄비는 일 비이고, 여름 비는 잠 비고, 가을비는 떡 비고, 겨울비는 술 비이다. 봄에는 비가 와도 들 일을 해야 하고, 여름에는 비교적 농한기 이므로 비가 오면 낮잠을 자게 되고, 가을비는 햅쌀로 떡을 해먹으며 쉬고, 겨울에는 술을 먹고 즐긴다는 뜻이다. (4) 새싹을 기르는 봄비는 꽃들의 부모라고 한다. (5) ‘볼열갈결’(사계절) 비는 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 같은 것이다. 봄비는 볼비이다. 봄비에 만물이 잘 보이고, 열비에 튼실한 열매 열리고, 갈비에 나뭇잎 보내고, 졸가리 훤한 나목에 결비 내린다. 친구 김래호에게 배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재무 시인은 <봄비>를 공유한다.
봄비/이재무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 한다
빗 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로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묘목을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봄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 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봄비 싸돌아 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오늘이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있은 지 41주년이 되는 해이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이니.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다. 올해 기념식 슬로건은 "오뤌, 시대와 눈 맞추다, 세대와 발 맞추다"이다. 불평등과 앵극화, 팬데믹 등 시대와 눈맞춘 오월 정신으로 위기를 타개하고 다양한 세대와의 조화를 추구하고 발맞춰 오월 정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41년 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아픈 역사가 시공간을 넘어 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하며 미얀마에서 재현되고 있다. 나는 518 기념일을 맞아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고 미얀마 시위에 대해 지지를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노래를 바친다.

이젠 황산벌 이야기를 좀 한다. 선배님 별장이 있는 곳이 옛날 황산벌이다. 그 별장에는 선배님의 성품 답게 잘 정리된 텃밭과 정원이 함께 자리했다. 정원에는 온갖 봄꽃들이 시기하지 않고 자기 모습들을 뽐내고, 이곳 저곳에 말로만 듣던 나무들이 여러 종류였다. <인문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 향기가 몸에서 나올 정도이다.
황산벌 전투를 좀 그려본다. 김유신은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 사비성(현재 부여) 향하여 진격하였다. 지금 추정하는 것으로는 남천정(지금의 이천)까지 무열왕을 수행한 김유신은 다시 남하하여 삼년산성(지금의 보은)을 경유하여 지금의 옥천-대전-두마 지역을 거쳐 백제의 심장부로 들어갔을 것으로 본다. 백제의 최후 방어 요충지라 할 수 있었던 탄현은 대략 지금의 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있는 마도령(馬道嶺)으로 본다. 다행히 별다른 충돌 없이 탄현을 지난 신라군은 황산벌에 도착하였다. 이 황산벌이 어제 오후를 지낸 선배님 별장이 있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와 신암리 일대의 너른 들판이라고 본다.
탄현을 지키지 못한 의자왕은 계백(階伯) 장군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 장군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 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영화 <황산벌>에서 남편의 칼에 죽음을 맞기 전, 계백 장군의 부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 나도 내 이름에 나의 목숨을 걸 수 있을까?
황산벌은 동쪽으로 천호산이 자리 잡고 있고, 서쪽으로는 계룡산의 험준한 산세가 길게 뻗어 있어 좁은 협곡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사비성(현재 부여)까지 너른 벌판이 이어지기 때문에 탄현을 넘은 신라군을 소수의 군대로 맞아 싸우기에 그나마 적절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황산벌에서 계백은 비록 군사는 적지만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군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눠 거듭 네 번을 싸웠으나, 백제군의 결사적 항전에 오히려 매번 패퇴하고 전세가 불리 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유신 동생으로서 부사령관을 맡고 있던 흠순 장군이 아들 반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이에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뒤이어 좌 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이 역시 여러 차례 적진에 돌입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였다.
여기서 화랑 이야기를 좀 한다. 화랑은 신라 교육제도의 결과이다. 화랑들은 귀족이 자제들 중 15-18세 된 청소년들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국토애를 기르는 한편 도의와 무예, 학문 등을 연마하였다. 화랑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원광법사의 세속 5계이다.
-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
-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
- 벗을 신의로써 사귀는 것
- 전장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는 것
- 생물을 죽여도 골라야 한다.
당시 화랑들은 전쟁테에서 전사하여 이름을 남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어진 재상과 충시이 화랑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화랑에서 양성되었다. 김유신도 화랑 출신이었다.
요즈음 오래 만났던 이들과 결별 수순에 들어 갔다. 그 이유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위해서이다. '격물치지'는 동양 고전 <대학>의 8조,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속한다. 사물의 본말과 시종을 파악하여 지혜를 이룬다. 중심(중요한 것)과 주변(사소한 것), 시작과 끝을 잘 알고 일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 물건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 그리고 중요한 것부터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물건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사리를 통하여 그 먼저 할 것과 뒤에 할것을 알면, 도(道, 머리를 밝혀가는 중에 만나는 그 길, 지혜)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중심과 부분, 근본과 말단, 일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아는 것이 격물(格物)이고, 이러한 격물을 통하여, 먼저 할 것(先)과 뒤에 할 것(後)을 정확히 아는 것이 '치지(致知)'이다. 이게 그 어려운 '격물치지'란 말이다. 여기에 '격'자가 나온다. 품격.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고민하며, 격물치지를 이루며 일을 할때 '격'이 나온다. 이게 지혜이고, 순 우리말 슬기이다. 격물치지를 모르는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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