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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젠 좀 뒤에 서기로 했다.

1630.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오늘 아침은 욕심(慾心) 이야기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욕심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을 소진 시키는 바닥 없는 구멍"이라 했다. 배철현 선생은 욕심을 "만족을 모르는 채 헛것을 갈망하는 괴물"이라 했다. 그러면서 배 선생은 "성공한 사람"이란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한 가지를 찾았거나 찾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성공의 방해꾼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 방해꾼은 부러움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렴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을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남을 부러워 한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남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을 부러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기준을 스스로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인 양 착각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이 고유한 것인 줄 알고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을 배교수는 무식(無識)한 사람이라 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을 모르는 채 어영부영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남을 부러워하는 삶, 남이 소유한 것을 나도 갖고자 하는 삶, 남이 말하는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두 번째 방해꾼은 흉내이다. 흉내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부러움은 정신적인 활동이라면, 흉내는 육체적인 활동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할 때 독창적이며 매력적이다. 반면 흉내를 내는 사람은 진부하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용기를 내어 자신만의 고유한 선율을 연주해보지만 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협화음으로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고유함에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어서 듣는 이의 마음 속에 있는 진정성과 공명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름다운 선율로 변화한다. 배교수에 의하면, "흉내는 자신의 고유함을 포기하려는 자살행위"라 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고유한 나를 위한 최선의 경주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다. 나 자신과의 경쟁이다. 달리기를 위해서 가장 가볍고 간편한 복장이 필수인 것처럼, 삶의 달리기에서도 단출함, 즉 단순한 삶이 필요하다. 또한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를 목표점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희미하게 만드는 마음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이 마음의 유혹을 배철현 선생은 '욕심'이라 하며,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욕심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라 했다. 

단테는 <신곡>에서 욕심을 다음같이 끊임 없이 휘몰아치는 태풍에 비유했다. "지옥의 휘몰아치는 바람은 결코 쉬는 법이 없다. 바람은 이영혼들을 자신의 힘으로 끌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을 바람에 날려 보낸다. 그들은 뒹굴고, 부딪히고, 결국은 괴로워 소리친다." (<지옥> 제5곡 31-33행)

배철현 선생은 욕심은 "끝도 없고 만족도 없다"고 하면서, "그것은 배가 부른 데도 더 먹으려 하는 비이성적 습관이며, 권력을 쥔 자가 더 많은 권력을 휘두르려는 횡포이다. 한자 욕심(慾心)에서 욕(慾)자를 해자하면, 배가 불렀음에도 더 많은 곡식(谷)을 하품(欠)하듯 입을 벌려 넣으려는 마음(心)이다.

거부하기 힘든 악마의 유혹이 식탐(食貪)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에 의하면, "인류는 요리법이 향상된 뒤 몸이 요구하는 것의 두 배는 먹는다"고 한다. 음식은 우리의 본성을 자극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육체를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강력한 유혹이다.

우리 인간은 탐닉(耽溺)을 좋아한다. 탐닉의 사전적 정의가 "어떤 일을 몹시 즐겨서 거기에 빠짐"이다. '닉'자가 '빠진다'는 말이다. 마치 익사(溺死)처럼, 물에 빠져 죽는 것처럼, 어떤 것을 너무 즐겨 빠져 죽는 모습이다. 우리는 자신의 쾌락을 일깨우는 외부의 자극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한다. 문제는 이런 탐닉이 우리를 중독 시킨다는 것이다. 그 중 거부하기 힘든 게 식탐이다. 그래 붓다나 예수와 같은 성인들에게 흔한 습관 중 하나가 금식이다. 금식은 자신을 지배하는 다양한 탐닉을 걸러내 자신을 주인으로 만드는 수련이다. 배철현 선생은 탐닉이 매우 미묘해서 확인이 힘들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신을 응시하는 오랜 수련을 통해 그 정체를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수련을 하면, 그만큼 유혹에 끄덕하지 않는 내공을 갖게 된다. 새로 시작하는 이번 주도 수련을 열심히 할 생각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내가 잘 아는 시인의 것이다. 우리 동네 시인이다. 사진은 나의 주말 농장 <예훈> 옆 밭지기가 동료들과 지붕을 달고, 빗물을 받는 물받이를 만들어 몰을 모으는 기술을 선보인 것이다. 물론 기계 연구소에 다니시는 분들이다. 이 비가 다 통에 담긴다고 생각하니 흐뭇하였었다. 실제로 오늘 아침에 가 확인 하니, 지난 주 말에 내린 비로 오늘 사진에서 보는 통의 3분의 2가 차 있었다.


뒤에 서는 아이/이태진


줄을 서면 늘 뒤에 서는 아이가 있었다
앞에 서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아서인지
뒤에만 서는 아이는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뒤에 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난 후에도
늘 뒤에 있는 것이 편안해 보였다

주위의 시선과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왜 그리도 익숙해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뒤에 선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침묵으로 대변하고 있다



나도, 내 일상에서, 이젠 좀 뒤에 서기로 했다. 다시 한번  금년 초에 다짐했던 "화이불창(和而不唱)"을 소환한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벌레가 '대충'이라 한다. 다 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되고 안주하는 나 자신을 깨어 있고 예민하게 하는 기회를 잃고 만다. 그냥 지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감각적 받아들이고 넘어간다. "뻔한" 이야기라고 자신의 일상에 한 가지라도 적용해 보려 하지 않는다.

"화이불창"은 <장자>의 '덕충부' 4절에 나오는 말이다. '남에게 동조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라이프 스타일은 '나'라는 자의식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로, 마치 물 같은 상태를 말한다.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글어지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 지고, 추우면 얼고, 더우면 증발한다. 이것은 완전히 빈 배가 된 상태,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알고는 있지만 쉽지 않다. 우리는 자의식을 버리고 nobody가 되어야, 자만과 허영에 대한 경계와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무슬림들은 매년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수련한다. 그들은 해가 떠서 질때까지 세 가지 행위를 금지한다. 그건 먹고, 마시기 그리고 성행위이다. 그것들의 특징은 본능적이란 데 있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음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식의 소중함을 상기한다. 건강 검진을 앞두고, 우리는 금식을 강요당한다. 힘들지만 금식을 하고 나면, 음식의 소중함을 다시 기억하게 되고, 음식이 없어 먹지 못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기억해 필요 이상의 음식을 먹지 않겠 노라 다짐하게 된다.

나는 최근 먹는 것에 많은 관찰을 한다. 아무 거나 먹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방심하면 과식에 아무거나 먹는다. 그건 내가 내 자신인 배 속의 장기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이다. 인생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먹고 마시는 내 일상을 점검하여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더 나아가 그 깨우침이 오랫동안 수련을 통해 습관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게 그 사람의 에토스이다. 그 에토스가 곧 그 사람의 평소 몸가짐이다. 

이런 에토스가 무너지면 로고스, 파토스도 힘을 잃는다. 메신저가 신뢰를 잃으면 메시지는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앨버트 허시먼은 <Exit, Voice, and Loyalty - 이탈, 항의, 충성>에서 기업이나 조직, 국가가 퇴보할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대해 연구했다. 조직이 싫으면 남아서 항의하거나, 떠나거나, 아니면 충성하거나 셋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 그리고 파토스(pathos). 이 세 가지 수사학적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이 일상의 습관에서 나오는 언행이며, 로고스는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이성적인 판단과 대화다. 파토스는 그 사람에 대한 평판에서 나오는 아우라다. 파토스는 흔히 '감동'이라고 번역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이끌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수사학(修辭學)이라고 여겼다. 수사 능력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타인을 설득하는 능력으로 다음 세 가지로 구성돼 있다. 로고스(논리), 에토스(화자의 성품), 파토스(감정)을 제시했다. 설득의 성패는 논리가 결정적일 것 같지만, 이외로 누가 말하는지와 감정적인 호소도 크게 작용한다. 이는 사람을 평가할 때도 예외가 아니며, 고난 끝에 황제에 오른 유비처럼 굴곡진 사연은 우리에게 더욱 뭉클하게 다가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 중 '에토스'를 가장 중요한 수사 능력일 뿐만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에토스는 로고스와 파토스를 구현하기 위한 기반이다. 에토스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아서 로고스와 파토스가 자라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흔히 '에토스'를 인격(人格)이나 품격(品格)으로 번역한다. 에토스는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만일 누가 인격이 훌륭하다고 말할 때, 그 인격은 무형이다. 만일 누가 품격을 지녔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의 품격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는 걸 점검하고, 습관이 되도록 수련하면, 그 모습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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