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3월 27일)

봄에는 참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그러나 순서가 있었다. 제일 먼저 봄을 기다리는 꽃은 동백꽃, 성급해서 눈 속에서 핀다. 그 다음은 버들강아지-갯버들 꽃, 다음은 산수유와 매화 그리고 목련이 이어진다. 병아리가 생각나는 개나리가 거리를 장식하는 동안, 명자나무 꽃, 산당화 그리고 진달래가 봄 산을 장식한다. 바닷가에서는 해당화가 명함을 돌린다. 다음은 벚꽃이 깊어 가는 봄을 알린다. 그 사이에 마을마다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이 이어진다. 3월엔 개나리와 진달래, 4월엔 목련과 벚꽃, 5월엔 라일락이 피면서, 적어도 매화와 산수유가 봄을 앞서 알리고, 그 끝자락에 철쭉도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었다. 이렇게 꽃이 피는 순서가 있었는데, 지금은 동시 다발적으로 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병들어 꽃이 피는 순서가 무너졌다. 진달래가 벚꽃과 같이 핀다. 지난 월요일에 그 진달래를 외래로 찾은 서울 병원 뒷산에서 만났다.
순서/안도현
맨 처음 마당 가에
매화가
혼자서 꽃을 피우더니
마을회관 앞에서
산수유나무가
노란 기침을 해댄다
그 다음에는
밭둑의 조팝나무가
튀밥처럼 하얀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에는
뒷집 우물가
앵두나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피어나고
그 다음에는
재 너머 사과 밭
사과나무가
따복따복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사과 밭 울타리
탱자 꽃이
나도 질세라, 핀다.
일부 지구물리학자들은 임계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온실가스를 줄이지 못해 지구온난화가 계속된다면 머잖아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다. 지구가 겨울에 예전보다 덜 식었다가 빨리 데워지기 때문에 봄꽃 피는 시기가 빨라질 뿐만 아니라 압착되고 있다는 거다. 다양하고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니 보기는 좋다. 진달래의 분홍은 은은하기는 하지만, 잿빛 산야를 물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 고, 개나리의 노랑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지만 너무 노랗기만 해서 귀해 보이지 않았는데, 목련의 송이송이 탐스럽고 벚나무의 팝콘 터지는 듯한 흰 꽃과 함께 피어 있어 한데 잘 어울린다. 아름다운 외관 너머에는 심각한 생태학적 미스매치(mismatch)가 발생하고 있다는 거다. 꽃이 너무 일찍 피었다가 져버리면 그 꽃에 의존해 살아가는 곤충의 활동 시기와 어긋나 곤충이 살 수 없고 그 곤충을 먹고 사는 새도 살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꿀벌 폐사 현상이 양봉업자의 애를 태웠고 근래로 올수록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꿀벌이나 새가 없으면 자연수분이 이뤄지지 않아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생태계에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봄꽃을 구경하는 게 기쁘지만은 않은 이유다.
주 69시간 근무제는 현행 주 52시간제에서 근무 시간 상한선을 높인 제도다. 일이 몰릴 때 주당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유연화’하자는 게 법안 취지다. 해당 개편안이 발표된 후 여론은 크게 악화됐다. 노동계뿐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개편안을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산업혁명 시기처럼 일하라는 것이냐며 거친 불만을 쏟아냈다. 정부는 1주에 69시간씩 근무하라는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바쁜 주와 안 바쁜 주에 시간을 나눠 쓰는 ‘유연근무제’라고 취지를 강조했다. 1주일 동안 69시간을 일하면 다른 한 주는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준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반응은 냉담했다. 어떤 직장이 사원을 1주일 동안 놀게 해주냐며 “현실을 모른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왔다. ‘몰아쳐서 일하고 몰아쳐서 쉬는’ 시간으로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 현 정부가 ‘노동개혁’을 시작했다는 거다. 그러니 ‘윤석열표 노동개혁’의 핵심은 불규칙적인 노동시간의 확대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발표하는 말의 잔치에 속지 않아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기괴하게도 선택권, 건강권, 휴식권 보장과 같은 권리의 언어를 선택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정의 이름으로 공정을 허물고, 평등의 이름으로 소수자의 권리를 부정하고, 노동개혁의 이름으로 노동을 하찮고 비천한 것으로 만든다. ‘1일 8시간’이 경직된 것으로 폄하되고, 시간 선택권을 기업에 쥐여주는 것이 ‘노동시간 유연화’로 추앙받으며 신노동정책으로 추진된 지 20년이 지났다. 이제 그 유연성을 더 유연하게,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화끈하게 열자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적정시간 일하고, 쉬고, 연애도 하고, 아이들도 키우는 기쁨을 함께 맛보는 그런 국민들이 왜 될 수 없단 말인가? 이번 논란이 전해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좋은 취지만 갖고 제도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법안을 만들 때는 현장 상황을 치밀하게 분석해 디테일을 담아내야 한다. 좋은 취지로 법을 제정하면 모두 잘 지켜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한국 직장의 근무 현실이 어떤지 면밀하게 파악했다면 “열심히 일하고 난 뒤 장기 휴가를 갈 수 있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은 나오지 않았을 테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워라밸'이다. 이 말은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 말이다. 일에만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 것, 또는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개인이 가져야 할 가치관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2018년 우리 정부가 시행한 ‘주 52시간 상한 제’도 '워라밸'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일주일에 일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을 역으로 계산해 그 최소 기준을 52시간으로 본 것이었다.
갈수록 진보하는 첨단 기술과 사회 시스템은 우리들에게 워라밸을 둘러싼 인식의 변화를 재촉한다. 올 초부터 세계를 뒤흔든 초거대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열풍은 좋은 예다. 농경사회는 물론 이전의 산업화 사회에서는 부지런히 정답을 암기하고 부단히 노력하며 선대에서 쌓아올린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지식을 모으고 분석까지 해주는 인공지능 비서를 두게 된 시대가 바야흐로 오고 있다. 물리적 시간을 들인 노동이나 학습보다는 창의적 태도로 좋은 질문을 던지는 혜안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제품이 필요하면 3D 프린터가 만들어줄 수도 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차이는 실제로 뭔가를 연마하는 시간보다 신선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착상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한국 딜로이트그룹이 2021년 발표한 ‘2021 밀레니얼과 Z세대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한국 밀레니얼 세대의 73%, Z세대의 76%가 ‘사회 전반에서 부와 소득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건국대 경영학과 이승윤 교수의 글에서 만난 거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약 45%)는 그러한 불평등의 주요 이유를 ‘기울어진 운동장’, 즉 부유층에 호의적인 법, 규제, 정책에 있다고 지목했다. 어쩌면 지금 MZ세대들이 워라밸이란 키워드에 집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하기 힘든 시스템…. 거기 발목 잡힌 이들이 집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불확실한 미래의 보상보다는 현재를 즐기는 삶일 수 있다. ‘미센트릭(Me-Centric)’ 성향, 즉 상대적으로 타인을 의식하기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성향 역시 워라밸 집중 경향을 키웠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수의 타인이 바라봤을 때 성공으로 여겨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 현실을 희생하기보다는 자신이 그려봤을 때 의미 있는 현재의 삶을 소소하지만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원한다. 그런 삶도 어쩌면 MZ세대들에게 나쁘지 않게 보일 수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그렇다고 MZ세대가 게으르거나 성공에 관심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는 거다. 일한 만큼 돌려받는 공정한 보상, 노고만큼 보장받는 휴식이 있다면 근로시장 연장을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부동산 ‘영끌’에 나설 만큼 돈과 성공에 관심이 높은 세대들이 MZ세대다.현 정부가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MZ세대 등의 의견을 보다 청취하는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연장 근무에 대한 휴식이든, 돈이든 과도한 일에 대한 ‘공정한 보상’을 명확히 약속한다면 어쩌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다. 불합리한 노동에는 단호하게 ‘No’하는 것이 요즘 세대다. 이승윤 교수의 주장에 나도 동의한다.
그나저나, 이래저래 갈등이 폭발하는 우리 사회에도 봄은 '어김 없이' 찾아 오고 있다. 그런데 꽃들도 혼란스러운지 순서가 없이 핀다. 봄꽃들이 한꺼번에 터지니 우선 보기는 좋지만, 좀 생각해 보면, 맘이 편치 않다. 불안하다. 해가 갈수록 더 진하게 실감하는 지구온난화가 봄꽃 잔치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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