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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229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3월 19일)
몇 일전 형님이 보내온 글을 오늘 아침에 공유한다. 진시황제가 죽고 2세인 호해(胡)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곁에는 환관인 조고가 있었다. 그는 진시황제의 가장 우둔한 아들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그 조고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신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사슴 (鹿)을 호해에게 바치며 말(馬)이라고 했다. 호해가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라고 하자, 조고는 신하들 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신하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1. 침묵파: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잘못 말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을 선택한 부류
  2. '사슴파': 분명 말이 아니었기에 목숨을 걸고 사슴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한 신하들
  3. '숙맥(菽麥)파':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슴이라고 하는 순간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슴과 말도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 이 '숙맥'들만 남고 모든 신하는 죽임을 당했다. 바야흐로 '숙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숙맥의 시대는 채 몇 년도 가지 못했다. 더는 숙맥으로 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봉기해 결국 진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됐다. 사마천의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전하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가 나온 배경이다.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숙맥菽麥)'이라 한다. 숙(菽)은 콩이고, 맥(麥)은 보리다. 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확연히 다른 곡식인데, 눈으로 직접 보고도 분별하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렇게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이런 쑥맥"이라고 욕하기도 한다. '숙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 뿐이겠는가? 상식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과 평상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 해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숙맥의 시대'가 되었다. 상식은 몰락하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도술(道術)이 성행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런 도술을 부리며 세상 사람들을 흘리는 도사들이 숙맥의 시대에는 주류가 된다. 혹세무민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 능력으로 인정된다. '숙맥파' 교주들은 분별력을 잃은 숙맥들을 이끌고 '허무맹랑(虛無孟浪)'한 말로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의 잇속을 챙긴다. 이미 '좀비'가 된 숙맥들은 이리저리 몰려 다니며 교주들의 구호에 맞춰 절규하고 거품을 물고 욕을 해 댄다.
 
'허무맹랑'의 뜻은 '터무니 없고, 거짓되어 실상이 없을 때'를 표현하는 말이다. 주로 듣는 이 입장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며, 너무나도 허황되어 전혀 설득이 되지 않고, 반감만 생길 때 자주 사용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숙맥의 시대'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숙(寂)'과 '맥(麥)'을 분별해야 할 언론과 권력기관은 숙맥의 시대에 기름 부이며 부추기고 있고, 각종 권력은 그 위에서 마음껏 난세를 즐기고 있다. 콩과 보리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의 세상을 침묵파로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어제 강미숙이라는 분의 <페북> 담벼락을 읽고 저장해 두었다가 오늘 아침에 다시 읽었는데,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을 만났다. "지금 윤가의 행보를 지켜보는 이 심정이 문재인의 대북 정책을 지켜보는 극우들의 심정과 비슷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저들(극우)들이 그토록 문재인을 일러 종북 좌파니 김정은의 꼬붕이나 했던 말들과 지금 우리가 내뱉고 있는 친일 매국이니, 일본의 꼬붕이니 하는 말들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는 거다. "저들(극우)들이 북한과 평화협정을 지지하는 것을 종북이라 규정한다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두 번 아니 세 번째로 버리고 일본에 조아리는 것은 종일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종북 좌파와 종일 우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사회의 이념 지도는 이렇게 양분되었고 다분히 의도적이다. 전선은 더 이상 보수 대 진보, 민주와 반민주가 아니다. 저들이 종북좌파로 부르는 민주세력과 우리가 친일파라고 부르는 반민족 세력과의 전면전인 것이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일까? 인문 운동가의 눈에는,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은인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노인들이나 배움이 짧은 사람들은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면 기가 죽는 때가 많다. 일단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은행원이라 하면 많이 배운 사람이라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권위주의 시대의 기억을 교정할 기회가 많지 않았거나 공적 영역에서의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어디까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엘리트 집단이 부패한 특이한 나라라는 것을 그들만 잘 모른다.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잘 살펴줄 것이라는 봉건적 믿음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일부 생각하지 않고, 책도 보지 않고, 편견이 신념인 것을 깨지 않는다면 딱 그 신념의 크기만큼 대접 받는다는 것,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은인으로 착각하고,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구조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동료가 되어 언젠가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는 것을 말이다. 진실이 눈앞에 있어도 보려고 하지 않는 의지박약인 사람들이 자식의 미래를 망친다는 것을 말이다. 시민의 권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에 무지하고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스스로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인지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한 사회 속에서만 살았던 사람은 자기를 비추어 볼 거울이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그동안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우칠 기회가 없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사는 사회는 일상이 영위되는 공간, 존재가 귀속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성숙한 사람들은 그래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을 낯설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민 낯을 그대로 비춰주고,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낯설게 보여주는, 그런 '불편한 거울'이 있으면 나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곧 '그날'은 온다. 세상이 예전과는 다르다. 초 연결 되어 있고, SNS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SNS 때문에 진실이 왜곡되는 부분도 있다.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다음 세 문장으로 슬픈 마음을 달랜다.
  1.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2.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3.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침 사진은 주말 농장을 오가는 길에서 찍은 쑥 사진이다. 오후의 맑은 햇빛을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빛/이시영
 
내 마음의 초록 숲이 굽이치며 달려가는 곳
거기에 아슬히 바다는 있어라
뜀뛰는 가슴의 너는 있어라
 
 
자신이 정한 ‘더 나은 자신’을 위한 목표를 위해 매일 훈련하며 정진하는 사람에게, 일상의 난제들은 오히려 그들을 더 고결하고 숭고하게 만드는 스승들이 된다.
 
“누가 지혜로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예수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요한 9:5)이시라고 말씀 하시면서, 실로암에서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다. 보게 하신 거다. 성서 속에서 본다는 것은 믿는다 것과 같다. 그러니까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못 보는 사람보다 잘 못 보는 사람이 더 무섭다. 우리는 흔히 외모나 조건 같은 편견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잘 보지 못한다. 오늘 미사 시간에 신부님 강론을 듣고 생각한 거다.
 
농담으로 가장 무서운 개 중에 무서운 것이 편견(偏見)이다. 편견은 다음과 같은 5가지의 경우 속에서 나온다. 그 중에 하나만 결핍 되어도 편견이 나온다.
•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
• 상상력 부족
• 오만과 자만심
• 공감 능력의 부족
• 삶의 내 외부 균형 상실
 
이것들을 결핍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이건 부처가 도달하고 싶어하는 가장 높은 시선이다. 그래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다. 일상에서 이를 위해 작은 실천을 하려면 다음과 같은 편견을 버려야 한다.
• 모든 일을 결과 위주로 생각하면서 언제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
• 늘 생산성 위주로만 생각하려 한다. 느긋하게 마음 먹고 쓸데 없는 일로도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비슷한 말이지만, 너무 성과위주와 효율성, 아니 이익이 되는 일만 하려고 한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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