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6.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어떻게 늙을까? 나는 내 고집만 피는 사람인가? 좀 더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다른 이의 말을 좀 더 잘 경청할 수는 없을까? 너무 까칠한 나를 본다. 그러다가 박선화 교수의 <공감>이라는 칼럼을 읽게 되었다. 다음 내용에 나는 100% 동의한다.
"수명연장과 사회변화에 따른 실버 세대의 정체성을 논하는 미디어는 세련된 외모와 건강 가꾸기, 취미생활 같은 윤택한 노년의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 현실 세계의 노인들은 과하게 희생적이거나 고집 불통에 가까워 배타적이고 불편한 대상이 된 지 오래다. 환경에 따른 지적·정서적 격차가 크다. 좋은 어른들은 많지만 세월에 걸맞은 시야와 지혜, 깊이와 배려, 더 나은 자신과 사회를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노년 모델은 흔치 않다."
박선화 교수는 자신의 롤 모델로 두 명을 지목한다. 하나는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주인공인 미스 마플 이다. 그녀는 영국 시골마을에 사는 평범한 노인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나이 들며 잃어버리거나 느슨해 지는 많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어서 이다. 자신의 의견에 당당하면서도 열린 귀를 가져서 독거 노인이지만 친구도 다양하다. 인간의 유약함을 잘 이해하기에 무조건 인간을 믿지 않지만, 같은 이유로 연민과 공감 능력도 출중하다. 무엇보다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일면 냉정하고 까칠해 보이지만, 그 이유가 관계의 선을 분명히 아는 지혜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적절한 거리를 아는 이들이 갖는 통찰력이 그를 명탐정으로 만드는 열쇠다.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하나의 답일 수 있겠다. 실제 우리가 균형적인 삶을 살려면 적당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배철현 교수는 '거리두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는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이다. 나는 이 말을 '물리적 거리 두기'로 바꾸었으면 한다. 두 번째는 '다른' 자신의 삶을 응시해 군더더기가 없는 삶으로 전환하는 '생활 속 거리 두기'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이 '수동적인' 거리두기는 개인의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생활 속 거리두기' 실천을 통해서만 성공한다.
배철현 교수가 말하는 개인의 '생활 속 거리 두기'란 자신의 언행을 깊이 관찰하는 '자기 응시'가 필수다. 인간은 어제의 습관대로 오늘 행동하기 마련이다. 습관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이슬람 속담에는 "인간은 조상의 자식이 아니라, 습관의 자식이다'란 말이 있다. 습관이 운명이라는 말과 이치가 통하는 말이다. '생활 속 거리 두기'란 그런 어제의 삶을 지속하고 연명하려던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보는 행위다. 그런 과거의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천천히 복기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고 감동적이지 않은 언행을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결심이다.
두 번째는 윤여정씨다. 75세의 이 노년 배우 역시 꽤나 까칠하고 솔직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마플의 미덕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명철한 이해력과 경계를 아는 지성, 지속적인 자가발전의 노력이다.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인생 모델로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 일기> 이미 지난 4월 28일과 29일에 이 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올해 오스카는 노년 파워가 상당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1957년생으로 65세다. 여우조연상을 두고 경합한 글렌 클로스는 윤 배우와 같은 75세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앤서니 홉킨스는 1937년생으로 85세다. 명배우들의 열정 이상으로, 함축된 세월의 역량들이 분출할 수 있는 미국 문화계의 토양에 부러움이 앞선다. 작년 오스카에서 봉준호 감독이 80세를 넘은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바친 헌사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지난 해 9월 6일에 이미 공유했던 시인데, 다시 한 번 더 공유한다.
늙어가는 길/윤석구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걸어가고 쉽습니다.
화장실에 붙어 있는 교훈 같은 이야기지만, 천천히 읽어 보니 일상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인은 늙은 사람이고, 어르신은 주위로부터 존경받는 노인이다.
- 노인은 몸과 마음이 세월이 가니 자연히 늙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자신을 가꾸고 젊어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 노인은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상대방에게 이해심과 아량을 베풀줄 아는 사람이다.
- 노인은 상대방을 자기 기준에 맞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좋은 덕담을 해주고, 늘 긍정적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
- 노인은 상대에게 간섭하고, 잘난체하며, 지배하려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스스로를 절제할줄 알고, 알아도 모른체 겸손하며, 느긋하게 생활하는 사람이다.
- 노인은 대가없이 받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상대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 노인은 고독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주변에 좋은 친구를 두고, 활발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다.
- 노인은 이제 배울 것이 없어 자기가 최고인양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노인은 자기가 사용했던 물건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그 물건들을 재활용할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 노인은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그 댓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뜨끔하다. 얻어맞은 것 같다. 잘 늙어가길 다짐하는 아침이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단순하게 살고 싶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답은 언제나 간단한 법이다. 복잡한 생각을 걷어내야 비로소 길이 보인다. 하수는 단순한 것도 복잡하게 만들지만, 고수는 복잡한 것도 단순하게 푼다. 고수가 되고 싶다면 생각의 군살을 베어 내라"는 글을 한 단체 카톡에서 읽었다. 나는 하수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생각을 도려내는 칼이 있다고 한다. 이 칼은 잡초처럼 무성한 생각들을 쳐내어 실체를 또렷이 드러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고(思考) 절약의 원리' 라고도 불리는 <오컴의 면도날 Occam's razor >이 바로 그것이다. 중세 영국의 신학자인 윌리엄 오컴이 제시한 이 논리는, 어떤 일을 설명할 때 복잡한 것 보다는 간단한 것이 정답에 가깝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의 현상에 두 개의 설명이 있다면, 긴 것보다는 짧은 것이 정답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생각이 깊을수록 말은 단순해 진다고 한다. 높고 깊은 경지에 이른 고수들의 말은 쉽고 간결하다. 복잡한 생각들을 걷어내고 단순하게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현상은 복잡해도 법칙은 단순하다. 선택은 포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버려라, 그러면 이긴다." 생각이 복잡하면 인생 길도 복잡하다. 쳐내면 쉽고, 버리면 가볍다! 이론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제 삶에서 실천은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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