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2월 10일)

시는 행(行)과 연(聯)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과 이어질 연이다.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行), 아래로 쌓여가는(聯) 일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인생이 육성이라면, 그게 곧 시"라 믿는다 했다. 인생도 걸어가면서 쌓이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다. "시는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빈 바구니예요. 당신의 인생을 거기에 집어넣고 그로부터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죠" 메리 올리버 시인의 말이다. 그래 최근에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를 시부터 시작한다. 오늘은 모처럼 서울에 다녀왔다. 그래 이제 글을 공유한다. 오늘 시는 <하지 않은 죄>이다. 지난 달 오후 5시 반부터 새벽 1시 반까지 쉬지 않고 빠져 들었던 <더 글로리> 파트2의 포스터이다.
하지 않은 죄/마거릿 생스터(캐나다 시인)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잊어버린 부드러운 말
쓰지 않은 편지
보내지 않은 꽃
밤에 당신을 따라다니는 환영들이 그것이다.
당신이 치워 줄 수도 있었던
형제의 길에 놓인 돌
너무 바빠서 해 주지 못한
힘을 복돋아 주는 몇 마디 조언
당신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느라
시간이 없었거나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사랑이 담긴 손길
마음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말투.
인생은 너무 짧고
슬픔은 모두 너무 크다.
너무 늦게까지 미루는
우리의 느린 연민을 눈감아 주기에는.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더 글로리>, 넷플릭스 시리즈는 학교 폭력과 복수에 관한 드라마이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는 복수가 많이 등장한다. 알콩달콩 로맨틱 코미디도 있지만, 조금 진지해 졌다 하면, 복수의 칼을 가는 얘기가 흔하고 흔하다. 프랑스나 미국 영화나 드라마엔 복수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내 페친 목수정의 주장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현실 사회의 반영이고 이 동네엔 복수의 정서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미국영화에서 총 없이는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총으로 해결하는 게 많은 사회이기 때문이고, 프랑스 영화에서 지루한 대화 장면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건, 이 동네 사람들이 말(대화 이든 토론이든, 수다 이든)로 세월 보내기 때문이다. 싸울 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말로 겨루거나 안 보거나 하지, 몇 년, 몇 십년 힘을 키워서 원수 갚는 시나리오를 쓰진 않는다." 다음은 그의 '페북 '담벼락"을 읽고, 리-라이팅한 것이다.
목수정은 다음 질문을 했다. (1)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당하고 시달리며, 목숨 부지하는 데 급급했던 우리는 기 펴고 살아본 역사가 길게 없어, 늘 "먼 훗날" 복수를 다짐하는 수 밖에 없었던 걸 까? (2) 집단적으로 든, 개인적으로 든 힘을 키워, 나를 망가트린 너에게 기어이 칼을 꽂을 날을 기약하는 것만이 그나마 현재를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었을까?
보통 한 나라의 드라마나 영화는 그 사회의 면모가 크게 한 몫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출산율이 사회 소멸을 예견할 만큼 낮고, 명품 소비는 세계 1위, 자살율도 1위, 산재사망 1위이다. 이 같은 극단적 수치들은 극단적인 드라마가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사회를 반영해준다. 우린 이대로, 학교 폭력이 기본 옵션인 사회로, 밤낮으로 폐지 줍는 노인들 모습이 일상의 자연스런 풍경인 걸로, 전대미문의 출생률은 그저 한국적 특성인 냥, 평화 구축은 커녕 선제 공격 운운하며 분단 상황인 채로, 이 고단한 모순들을 끌어안고 살기로 한 모양이다. 사회적 해결, 개인적 응징도 힘드니, 그걸 해주는 드라마에 박수치고, 그 상업적 성공에 열광하면서.
학교폭력의 원인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엉켜 있다.
- 가해 학생이 자신의 행위가 잘못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
- 보복이 두려워 이웃들에 말할 수 없는 피해 학생의 입장
- 범죄 수준이 아닌 그저 학생들 간의 사소한 갈등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이 처한 비정상적인 가정환경과 교육환경
- 어린 학생을 처벌할 수 없는 법의 사각지대 등
누구도 학교폭력이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세월을 한국사회가 지난 20~30년 꾸역꾸역 살아왔다. 피해자가 찾은 해법이 필생을 건 복수극의 준비라는 것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납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이 캐슬>이란 드라마가 무한경쟁의 입시 지옥도를 바꿔 놓는데 눈곱만큼도 기여하지 못했듯, (오히려 그 반대였다) <더 글로리> 또한 학교 폭력이란 고질적 문제에 대한 일말의 반성과 해답을 이끌어 내는 데에 기여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우리 언론은, 태국 사회가 이 드라마를 보고, 학교폭력이란 사회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 중임을 보도할 뿐,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어떤 성적을 내고 있는지, 작가의 회당 고료는 얼마이고, 송혜교는 드라마를 위해 살을 얼마나 뺐는지를 알려줄 뿐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세상을 들썩이는 드라마가 현실의 고통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조금이나마 문제 해결을 향한 실마리를 제공할 거라는 기대를 사람들은 하지 않는듯 하다. 어차피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이 드라마가 거둔 성공과 벌어들인 돈에 대해서만 관심두기로 한 것 같다. 드라마는 드라마고, 현실은 현실이라 간단히 정의하며, 언젠가부터 만인의 비타민이 되어 버린 '국뽕'을 한 잔 더 들이 키게 해 줌에 흡족해 할 뿐이다. 그러는 가운데, <더 글로리> 파트 2가 곧 출시된다고 한다.
그레 오늘 아침 나는 진정한 복수는 무엇일까 질문 해본다. 드라마 주인공은 “타락할 나를 위해! 추락할 너를 위해!”라며 복수의 서막을 알린다. 그러나 그 복수의 결말은 나와 원수 모두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만 가슴속 깊이 남지 않을까? 나도 그런 복수를 꿈꿨던 적이 있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 신부님은 <성경>에서 그 힌트를 찾았다. "성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30-37)가 나온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고, 무심하게 그 사람 곁을 지나가던 사제(제사장)와 레위인(제사장을 돕는 계층)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명망이 있는 직업군이다. 철저히 자기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사회적 위치만을 신경 쓰는 이들이기에 길가에 버려진 사람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사회적 지위도 없고,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방인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상처 입은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여정을 중단하고 계획을 수정해 그를 돕는다."
어쩌면 진정한 복수는 원수, 그리고 그의 악행과 상관없이 내가 '당당해지는 삶'이 아닐까 싶다. 나를 추락시키려 했던 원수의 뜻과 달리 하느님께서 창조한 ‘나’라는 소중한 존재가 추락하지 않고, 추락할 수 없으며, 또 보란 듯이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많은 이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추락하지 않고, 추락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과 행동이 진정한 복수의 서막이 아닐까 싶다.
추락? 왜 이 드라마의 제목이 '영광'이란 뜻의 '더 글로리'일까? 살다가 간절하게 원하고 바라던 것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는 실망하며, 그 실패에 몹시 괴로워한다. 그러한 상황에 빠진 나에게 사람들은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며 위로한다. 그러나 당시의 감정 상태로는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은 실패를 모르고 계속 성공하면서 잘 나가다 오만에 빠질 수 있다는 지혜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실패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면서 오히려 삶의 도움이 된다.
오만이 찾아오는 것은 자신이 이룬 현재의 성취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아니 착각하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한다. 오만을 그리스어로는 '휴브리스(hubris)'라고 한다. 휴브리스란 자신의 처음 먹은 마음을 잃고 난 뒤, 반드시 따라오는 극도의 자만심이자 과도한 확신이다. 사람은 오만에 빠지면 눈이 먼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해야 할 현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기 앞에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있어야 할 시간과 장소를 헤아려 아는 사람이다. 반면 오만에 빠진 사람은 장님이 되고, 그 뒤에 찾아오는 불행을 만나게 된다. 그것을 그리스어로는 '네메시스'라고 부른다. 이 말은 '복수'라고 번역되는데, '내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그 어떤 것을 받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받고 있는 이 모든 혜택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나 혼자 이룬 것은 없다. 따라서 살면서 잘나갈 때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관조할 줄 알아야 한다.
인문정신은 '아파도 당당하다.' 문제가 있다면,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의 길은 아프다. 아파야 살아있는 것이다. 안 아프면 죽은 것이다. 삶은 원래 아픈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힘든 데도 버티며 사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아픈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방향을 선택하면 강물에 휩쓸려 내려간다. 그것은 살아도 죽은 것이다. 왜? 죽은 물고기만 내려가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그런데 순응해야 하는 현실은 죽은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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