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월 24일)

오늘부터는, 어제 공유한, 산상수훈 '팔복' 중 한 가지 씩 정밀 독해를 한다. 오늘은 제1복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를 갖고 길게 사유를 해 본다.
사람들은 다들 '내 삶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돈을 통해, 직장을 통해, 가족을 통해, 명예를 통해 그걸 구축한다. 그리고 안전장치가 버텨 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다. 궁극적 안전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다. 그게 영적인 가난의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영적인 가난'의 태도는 이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려고 하는 거다. 내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이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를 누리는 거다. 자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무위적 삶을 살려는 자세이다. 내가 인위적으로 나의 안전을 구하지 않고, 자연에 맡기고 의지하면서 살려는 태도이다. 스스로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런 자세가 나온다.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의 자세 문제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기보다는 자연의 힘에 맡길 줄 아는 자이다.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그 일 자체가 돌아가는 것을 볼 줄 아는 것이다.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여유 있고, 지혜롭게, 넉넉하게, 잘 살 수 있게 된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을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리고 초조해 하지 말고, 조급증을 덜어내고 싶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자중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향유하고 싶다. 하루 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시작된 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지고 지금껏 우리들의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가능성이 십분 발현되기도 하고 발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쟁을 통한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의 국민의식을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행복하기 위해 거창한 무언 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남 보란 듯이' 살지도 않는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누구보다 초조함에 시달렸고 그것의 문제를 잘 알았던 작가 카프카는 초조함이야말로 인간의 죄악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두 개의 죄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아마도 카프카의 문학은 이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이 전혀 근거 없는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초조함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초조한 자는 문제의 진행을 충분히 지켜볼 수 없기에 어떤 대체물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해결책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태의 종결은 불가능해진다. 파국을 막기 위한 조급한 행동이 파국을 영속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많은 지름길들, 금방 치료가 되고 금방 구원이 되고 금방 개선이 될 것으로 보이는 그런 많은 길들이 실상은 비극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우리의 초조함이 닦아놓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나는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또한 철학이라고, 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 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고병권)
말을 좀 바꾸어, 세속적인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현 카톨릭 교종(한국에서는 '교황'이라 한다) 프란치스코는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고 기도 하며, “막대한 부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를 경고했다. 그리고 낮은 자세로 사회·경제적 약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껴안자고 말했다. 교종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저파(低派)’였다. 교종은 취임 후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이며 불평등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제적 문제”임을 계속 강조해 왔다. 한국을 방문하여, 교종은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싸우라”고 강론했지만, 우리나라 유력 일간지가 교황 방한을 축하하며 뽑 았던 기사 제목은 “돈이 도네요… 고마워요, 프란치스코”였다. 또한 교황은 “무한경쟁 사조에 맞서라”라고 강조했지만, 정부와 기업의 최상부는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제도와 문화를 아직도 찬미하고 있다.
교종이 지적한 문제는 단지 신심(信心)과 기도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세속의 정치, 법,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연대하여 세상의 모순과 부딪치며 끈질기게 노력할 때 세상은 조금씩 바뀐다. 교종 자신이 “공동선을 위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이기적”이라며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중립을 지켜야 하니 세월호 리본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답했음을 기억한다.
가공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과 폭력 앞에서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은 악의 근원이다. 그런 비겁한 자들의 머리는 '자기 이익'이라는 산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용기의 반대편에 있는 비겁은 무시무시한 대상 앞에서 도망치는 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비겁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출 거울을 소유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끊임없이 타인의 이미지에 탐닉하는 것이다. 조심할 일이다. 비겁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위대한 자신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이다. 그건 자신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보니 하는 행위라 고는 늘 다른 사람을 훔쳐보고 부러워하고 흉내 내는 일 뿐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부러움은 무식이고 흉내를 내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말했다.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 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의 뜻대로 하기보다는 자연의 힘에 맡길 줄 아는 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세상이 보이고, 비우고 나면 다시 무언가 채워진다. 마음과 물질이 아닌 영혼 깊이 모두를 비워내다 못해 긍휼과 사랑으로 가난하게 되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재물이 부자인 사람은 근심이 한 짐이고,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행복이 한 짐이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레오나르도 다빈치) 그건 오늘 아침 고유하는 시처럼, "흰색"이다.
흰색에 대하여/이향아
흰색은 미뤄둔 사랑이다.
백에 하나라도 혹시 몰라서 밑바닥에 깔아 둔 명주 짜투리이다.
흰 말 타고 오려나 오늘쯤 그대는
멀쩡한 하늘 아래, 칼빛처럼 번뜩이는
흰색은 예감이다.
이젠 끝났다. 다시 시작
흰색은 낯선 출발이다.
찬서리 낮게 깔린 새벽의 고요
뿌연 길 걸어서 가출하는 마음이다.
흰색은 가난이다.
이른 봄 엎드려서 쑥을 캐는, 엎드려 밭두렁에 쑥을 캐는
온 들판에 널부러진 우리들의 입성이다.
흰색은 절망이다.
'이제는 여기 아무것도 없음' 손을 저어 보내는
흰색은 거절이다.
어제 같고 그제 같은 나날, 지치도록 바라보면
흰색은 순종이다.
외로운 탐색도 끝난 좌정.
수 천 수 만으로 떨어지는 나비떼
흰색은 황홀한 어지럼증이다.
물가루 안개비는 치근거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뜨고 사는 눈이여,
흰색은 무심이다.
아니다, 아니다, 흰색은 무지다.
비어 있음으로 눈물나는 순결이다.
함박눈 쏟아지는 고향 언덕엔
겨울 바람 펄럭이던 흰 치마자락.
불을 켜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깃발이다.
흰색은 초월, 초월하는 슬픔
하얗게 목을 늘여 투항하고 싶은 오후 세시 바닷가
미칠듯한 적막이다 흰색은.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어제에 이어, 가속노화를 그치게 하기 위해, 복합적응계인 '몸'에 대한 이해를 이어간다. 오늘의 주제는 두 개이다. 하나는 '마음의 앤트로피가 높을수록 뇌가 쉬지 못한다'는 것과 '디폴트모드네트워크 안정화 시키기' 이야기이다. 디폴트모드네트워크는 신경과학에서 어떤 자극에 집중하거나 과제를 수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지 않고 쉴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을 말한다.
아무 일에도 집중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여러가지 생각조각들이 튀어나오는 상태를 '마음 방황'이라 한다. 마음이 저절로 평안해 지거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보다는 보통 현안에 대한 걱정, 무언 가에 대한 후회, 이루거나 가고 싶은 것에 대한 욕심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상황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를 불교적 용어를 사용하여 '번뇌(煩惱)'라고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도 우리의 뇌는 쉬지 않는다. 그래 명상을 하라는 것 같다. 명상은 뫼를 쉬게 하는 거다. 따라서 명상할 때는 자신의 호흡에 만 집중하라고 하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였다.
번뇌를 이해하려면, 복잡적응계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말은 여러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해서 일부의 변화가 다른 요소도 변화시키는 비선형 시스템을 뜻한다. 연속적인 당부하 충격이 만드는 악순환, 도파민 자극의 다면적인 해악 역시 작은 변화가 여러 가지 구성 요소에 영향을 끼치는 비 선형적이고 역동적인 복잡적응계의 사례이다.
불교에서 번뇌를 일으키는 탐진치, 욕심, 분노, 증오 등 여러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더 크고 해로운 번뇌를 만든다고 보았듯이, 현대 의학에서도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예를 들어 부정적인 사고 방식이 고착화되면,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 만성통증 등 질병마저 일으키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신경과학에서 어떤 자극에 집중하거나 과제를 수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지 않고 쉴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을 라 한다. 이 네트워크의 부위는 다음 그림과 같다.

후방대상피질, 내측전두엽피질, 측두두정연접부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사상하부, 편도체, 중심회색질 등과 연결된다. 디폴트모드네트워크는 몸 안팎의 자극의 뇌로 받아들이며 감정과 동기부여를 조절하고 스트레스에 대한 여러 내부 장기의 반응에도 영향을 주는 머릿속 인터페이스 또는 사고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과거의 경험, 기억과 함께 개인의 무의식적 사고체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 디폴트모드네트워크는 몸 안팎에서 일어나는 정보에 바로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특별히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화벨이나 메신저 알림이 울릴 것을 기대하면서 약간 긴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스마트폰 알림에 시달리고, 메일함이나 메신저, 웹부라우저 여닫기를 반복하는 현대인의 뇌에서는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정작 집중해야 하는 일에는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 반대가 몰입하는 상태이다. 몰입은 어떤 과업에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상태이다. 바로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가라앉은 상태이다.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동기부여, 성격, 불안, 인지 기능 등 여러 정신적인 요소에 영향을 준다. 특히 마음 챙김 등의 명상을 하면 연결성이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가라 앉는다. 그러니까 명상이 중독이나 우울증 등 문제가 생긴 뇌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디폴트모드네트워크는 자신이 그동안 경험한 생각과 느낌이 만들어낸 역동적인 함수와도 같다. 예컨대 우울한 상태의 뇌는 같은 경험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같은 객관적 현상이라도 디폴트모드네트워크의 해석에 따라 주관적 경험이 달라지는 것이다. 마음의 엔트로피(혼란스러운 정도)를 상정할 수 있다. 고요하고 평안한 마음은 무언가에 집중이 잘되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와 같다.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고요해지는 상태이다.
다음 그림처럼 안정적인 디폴트모드네트워크에서는 회복력이 높아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금세 고요와 평안을 되찾는다.

마음 챙김 같은 명상은 마음의 회복력을 높여준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공이 고요하게 놓여 있던 엔트로피의 구덩이가 더욱 깊고 넓어지는 것이다. 명상하는 것이다. 명상의 핵심은 자주 노출되던 좋지 않은 자극을 줄이고, 그 해로운 자극에 노출되어 있을 시간 대신에 바로 그 순간을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심호흡을 하는 거다.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자극을 없애고 호흡과 자세를 관찰하는 연습을 하면 일상에서 명상을 할 수 있다.
마음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훈련은 근력운동과 비슷하다. 지금에 집중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 점점 높은 수준의 정신 상태에 이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근력운동을 짧은 시간이라도 매일 꾸준히 하면 몇 개월 내에 몸이 크게 변화하는 것과 같다. 반면에 마음 방황을 돌보지 않고 따분함을 견디기 어려워 하면 평온한 뇌 상태를 만드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마치 편안한 침대에만 누워 지내면 하루에 1% 정도 씩 근력이 떨어져 나중에는 운동할 힘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다음 그림은 안정된 상태에서 항상성을 유지하던 공이 내외부의 자극 때문에 구덩이 바깥으로 빠져나가 굴러 떨어지면, 곧 마음 방황이 시작되고, 도파민 결핍을 느끼면서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는 상태로 바뀌게 된다.

마음의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이다. 이런 번뇌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하며 화도 잘 내고 집중력도 낮다. 더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 쾌락과 폭음은 이 마음 방황을 잠시 달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디폴트모드네트워크의 연결성을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꾼다. 공이 고요하게 놓여 있던 구덩이가 얕아지고, 더 작은 스트레스에도 잘 견디지 못하게 된다. 생활습관 디폴트모드네트워크를 병적으로 변화시켜 우울감과 불안, 통증, 분노가 따르게 된다. 자연스레 당분, 소비, 음주 등 빠른 도파민 분비를 좇게되는 번외의 악순환 이어진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마음의 엔트로피는 더 넓은 삶의 영역과도 상호작용한다. 초가공식품과 단순당, 정제곡물 섭취에 따른 대사 및 신경학적 변화와 스마트폰 등 자극원이 주는 보상에 의존하는 현상도 디폴트모드네트워크와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들을 통해 밝혀졌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이 모두 가속노화 사이클에 빠져들어 고통 받지 않기 위해서는 삶의 여러 영역을 함께 살피고 돌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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