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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한국형 건강 수업 (4)

224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월 23일)
 
오늘은 계묘년 설 명절 연휴 둘째 날이다. 큰 일정도 없고, 이 치료때문에 와인도 안 마시니, 시간이 많다.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다. 그래 음력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계묘년 아침에 올해의 삶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다시 산상수훈의 팔 복을 소환했다.
 
지난 20일 아침에 말했던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경의 신약성서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는데, 그 것은 '주님의 기도(주 기도문)'와 '산상수훈의 팔 복'이다. 이 '팔 복'은 우리 현대인들이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한 답을 던지신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을 위한 8가지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 여덟 가지는 관념적이거나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구체적인 강령(綱領)이다. '팔 복'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팔 복의 증표'로 살고 싶다. '팔 복'을 영어 'Beatitude'라 한다. 이걸 풀면, "Be(존재)+Attitude(태도)"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그것을 마주한 인간의 역량을 측정하는 시험(試驗)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중립적이다. 그것들은 행운이고 동시에 불행이다. 그것들은 희망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건-사고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것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태도(態度)는 곰(熊)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제1복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는 거다. 자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무위(無爲)적 삶을 사는 거다. 마음이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 자세의 문제이다.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하고 있는 일 자체로 돌아가 즐기며 몰입하고 전념하는 하는 거다. 제2복은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이다. 슬프면 슬퍼하라. 아픔이나 고통을 피하지 마라. 어려움을 피하지 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생로병사를 두려워 하지마라.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다.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 한다. 슬픔의 끝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고, 힘을 얻는다. 그래 사람들은 상처 받은 자에게 오히려 기도를 부탁한다. 제3복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이다. 온유하라. 온유는 성격, 태도가 부드러운 거다. 그 말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 거다. 그건 내려놓음에서 나온다. 그건 나를 비우고 도에 맡기는 거다.
 
산상수훈의 '팔 복'중 4-8복은 맹자가 말한 '4단(端)+1=5행'으로 바꿔 볼 수 있다. 제 4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의 문제는 '의(義)'로, '정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맹자 식으로 말하면,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 반대로 의로운 사람은 그 자체로 흡족하다. 그 반대가 찝찝함이다. 양심이 다 말해준다. 매사에 정의로워야 한다. 제 5복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의 문제는 '인(仁)', 즉 자비, 아니 사랑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제 6복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의 문제는 '예(禮), 예절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제 7복인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의 문제는 지(智), 지혜의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제 8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의 문제는 신(信), 믿음의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오늘 아침은 그 '팔 복'을 전체적으로 공유하고, 내일부터 몇 일동안 하나씩 나누어서 더 정밀하게 읽어 볼 생각이다.
 
어제는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오랜만에 재개된 고향 친구 모임에 다녀왔다. 우리는 흔히 실수 하는데, 고향을 한자로 이렇게 쓴다. 故鄕. 옛고(古)자를 쓰는 古鄕, 이게 아니다. 고향은 단지 "단순히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오랜 시간 전의 동네"가 아니다. '故'자는 '연고'고, '근거'고, '원래'이고, '본래'를 의미한다. '까닭'이자 '연유'다. 그러니까 고향은 나의 본래 모습, '원래의 나'가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는 내가 '일반명사'로 이탈하지 않고, '고유명사'로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반면, '나'들이 '타자'들의 거대한 공간에서 또 다른 '타자'로 동화되어 가는 곳이 타향(他鄕)이다. 우린 타향에서의 '나'는 '고유명사'인 '나'로 돌아다니거나 '원래의 나'를 드러내고 다니기보다는 '타자'들과 동화되면서 갖게 된 다양한 수식어의 덩어리를 달고 다닌다. 이른바 '익명성'이다. 타향에서 나는 익명성 속에 숨어 지내는 '감춰진 존재'이다. '감춰진 존재'들끼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양한 수식어를 통해서 가늠할 수밖에 없다. 반면, 고향에 산다는 것은 '나'로 사는 일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일원으로 존재해 버리면, 그것은 모두 타향살이다. '나'를 삶의 주인으로 두지 못하고, 그 주인 자리를 화장기로 꾸며 놓은 뻣뻣한 가면에 양보하고 사는 사람은 고향을 잃고 방랑하는 사람이다. 고향은 바로 내가 나로 드러나는 곳이다. 네 주인 자리를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 고향을 떠나지 않거나 고향으로 되돌아 온 사람이다.
 
반면,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고향을 기억 속에서만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세상은 낯선 곳이다. 1934년에 나온 노래 ‘타향살이’는 고향을 상실한 이들의 처연한 심정을 이렇게 노래한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망연한 시선이 절로 느껴진다" 면서, 김기석 목사는 그들에게 고향을 선물하자고 한다.
 
예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다 남겨두고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합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 방식이다. 하나를 찾으려 다가 아흔 아홉 마리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은 대개 자기가 아흔 아홉 마리 안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쉽게 탓한다. 그 한 마리 때문에 우리가 모두 위험에 빠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배제의 전략이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의 신세가 될 때가 있다. 그때는 목자가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필사적으로 바라지 않겠는가? 하나를 쉽게 포기하는 사회는 언제든 아흔아홉도 버릴 수 있는 사회가 된다. 지금 안전한 자리에 있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다양함과 차이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난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정서적 고립 상태 속에 살고 있는 이들 말이다. 이 일은 전체주의의 유혹에 항거하는 일인 동시에 누군가에게 고향을 선물하는 일이다. 선택에 따라 고향은 어디에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까치밥/송수권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등 따숩게 비춰주고 있지 않으냐.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어제에 이어, 가속노화를 그치게 하기 위해, 복합 적응계인 '몸'에 대한 이해를 이어간다. 오늘의 주제는 두 개이다. 하나는 '쾌락의 총량은 늘릴 수 없다'는 것과 '도파민 리모델링' 이야기이다.
 
도파민 신호에 빠르게 적응하는 뇌의 보상체계가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이 더 강한 자극원에 노출되면 더 약한 자극원에 대한 보상의 정도가 급감한다는 거다. 다음 그림을 보면 이해가 쉽다.
 
일반적으로 강한 자극원을 경험할 때의 쾌락의 정도를 묘사한 것이다. 술, 도박, SNS, 쇼핑, 게임 등에서 쾌락을 얻으면, 운동이나 산책, 음악이나 독서 등에서는 쾌락을 적게 느낀다. 중독성이 강한 틱톡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보다는 긴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체류 시간이 짧아지는 현상도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그 다음 더 강한 자극에 노출되면 그 보상정도는 오래지 않아 기저 수준으로 떨어진다. 다음 그림이 그 것을 잘 보여준다.
 
매우 강한 자극원을 경험하면 적응을 통해 기존의 자극이 주는 보상의 정도는 그 비율이 아주 낮게 조정된다. 예를 들어 합성마약인 헤로인을 정맥에 주사했을 때0 받는 보상은 일상적인 삶의 즐거움과 비교하면, 수십, 수백 배 차이가 난다. 그런데 적응이 일어나면 전체적으로 분비되는 도파민 총량은 어차피 기저 수준으로 회귀하고 정상적인 삶의 즐거움은 원래의 수십, 수백 분의 일로 줄어든다. 그래서 더 큰 보상(도파민)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며 그 결과는 절망일 수밖에 없다. 헤로인 중독자의 눈에 세상은 흑백으로 보인다. 업무는 따분하게 느껴지므로 직장에서의 집중력이 떨어진다. 자기를 돌보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여가 시간이 생기더라도 쉬지 못한다. 독서, 묵상, 산책, 운동 등의 활동이 삶에서 빠지니 신체와 정신 건강이 함께 나빠진다. 다음 그림처럼, 불필요한 보상 자극원을 줄여 나가면, 정상적인 활동이 주는 보상의 크기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적응이 이루어진다. 자극원을 줄이거나 늘려도 쾌락의 총량은 차이가 없다는 걸 잘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쾌락의 총량을 늘이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틀린 거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쾌락의 총량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쾌락의 총량은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비만 늘고, 경제적으로 궁핍 해져(돈이 아무리 많아도 궁핍을 느끼게 된다) 고통을 받고, 가속노화 사이클에 빠져서 더 빨리 아프고, 더 오래 고생할 뿐이다. 사람은 누울 수 있는 반 평의 공간만 있어도 충분하고 하루에 2000 칼로리를 소비하는 것이 전부인 생물학적 존재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적응 개념을 이해하면, 우리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삶을 설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희원 교수가 제안하는 방법은 "도파민 리모델링"을 해 보는 거다. 이상에서 술과 커피를 줄이고, 스마트폰을 덜 사용하고, 단순당, 정제곡물, 초가공 식품을 덜어내는 거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물리적, 정신적 틈새에 "4M 건강법"으로 일상 활동을 챙기는 거다. 그러면 삶에서 쾌락을 주는 자극을 대부분 털어냈는데도 일상의 즐거움은 지속된다. 선순환이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 뱃살이 들어가고, 허리둘레가 줄어든다. 스마트폰 사용시간이 줄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더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게다가 인지능력이 좋아지면 하는 일의 효율이 향상된다. 또한 소비가 자연스럽게 줄어들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돈 문제 때문에 걱정도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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