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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큰 도는 평탄한 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223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월 15일)

노자 <<도덕경>> 제53장을 읽는다. 제목은 '큰 도는 평탄한 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쉽고 편한 길이 있는데 말이다'라 할 수 있다.. 이 장은 <<도덕경>> 전체 81장 가운데 정치적 메시지가 가장 두드러지는 장 가운데 하나이다. 노자는 이 장에서 민생은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위정자들의 모습을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노자의 신랄한 사회 비판이다. 통치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리얼하게 대비시키는 그의 언어는 오늘날의 양극화 양상에 대하여서도 같은 경종을 울린다.

使我介然有知(사아개연유지) 行於大道(행어대도) 唯施是畏(유시시외) 大道甚夷(대도심이) 而民好徑(이민호경): 나에게 큰 지혜가 주어져 대도의 정치를 실행할 수 있다면 탐욕을 경계할 것이다. 대도의 길은 매우 평탄한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우시시외(唯施是畏)"에서 '시(施)'는 '과시하고 으스대는 것'이다. 남에게 군림하고, 복종시키려는 인간의 과시욕이 결국 지도자가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해야(畏) 할 일이다. 대도의 실천은 아주 간단하다.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사적인 탐욕을 버리고 백성과 함께 나누고 백성을 섬기는 것이다. 대도는 마으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아주 편안한 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편한 길을 두고 어렵고 힘든 죽음의 기로 가려고 할까?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노자가 살던 시대의 귀족은 탐욕에 빠져 백성을 착취하고 사치를 일삼았다.

朝甚除(조심제) 田甚蕪(전심무) 倉甚虛(창심허) 服文綵(복문채) 帶利劍(대리검) 厭飮食(염음식) 財貨有餘(재화유여) 是謂道(盜)夸(시위도과) 非道也哉(비도야재): 지도자의 조정은 번듯하고 깨끗한데, 백성들의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곳간은 텅 비었다. 귀족은 비단옷을 걸쳐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음식에 물릴 지경이 되고 재물은 쓰고도 남으니 이것을 도라 할 수 있는가? 아니, 이건 도가 아니다. 이것을 도둑의 사치라 한다. 도가 실현되는 정치가 아니다.

조정은 풀 한 포기 구경 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번듯하게 꾸며 놓고 있지만 백성들의 삶의 터전인 밭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곳간은 텅텅 비어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는데도 왕과 제후, 귀족들은 비단 옷을 걸쳐 입고 그 위에 날카로운 칼을 차고 다닌다.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이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재물과 음식으로 호의 호식(好衣 好食)한다. 다른 버전에서 노자는 이런 자들을 도둑("盜")이라고 정의한다. "과(夸)"는 '사치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도적떼의 사치와 자랑이라는 다소 과장된 언어 사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자는 "어찌 이것이 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울분과 분노가 섞인 문장으로 장을 마무리한다. 겨자씨만한 지식만 있어도 도를 실천할 수 있다는 첫 번째 문장은 자신이 작은 자리라도 얻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으면 이런 불합리한 정치질서를 일소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그러나 노자가 <<도덕경>>을 남기고 속세를 떠난 것을 보면 불행하게도 노자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 장에서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대도의 실천은 지극히 쉽고 편안하다는 것이다. 대도의 실천은 겸손과 낮춤의 태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죽음의 길로 가는 이유는 욕망과 탐욕에 이끌려가기 때문이다. 더 큰 땅을 차지하고, 더 많은 재물을 원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군림하려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살 수 있는 땅, 생지(生地)에서 죽음의 땅,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자기 욕망에 따라 사용하는 자본가는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과 쓰는 것이므로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얻었으니 어떻게 사용해도 괜찮다는 면죄부를 가질 수 없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는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부는 더욱 존경받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가진 것이 도둑이 아니라, 소유한 것을 오로지 나만의 사치와 욕망을 위해 사용할 때 도둑이 되는 것이다.

한 행복 연구소의 모토가 "선물을 사러 가지 말고, 선물로 살아 가라"이다. 우리 최고의 선물은 '선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남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선한 마음을 넘어 선한 행동은 <미가서>가 잘 말해준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네가 만난 신이 요구한 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인향만리(인향만리)의 비밀이다.

(1) 정의 실천: 정의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미쉬파트'란다.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공평하게 판단하다, 재판하다'이다. 그러니까 '미쉬파트'의 소극적 의미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벌을 넘어 사람들 각자에게 걸맞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성서는 지속적으로 미쉬파트는 '과부, 고아, 이민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그들의 바람을 사회에서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오늘날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한 부모가정, 노인계층이 포함된 기초생활자, 차상위 계층 등이 바로 이 미쉬파트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사회의 성숙도와 정의 실현 정도는 순전히 그 사회가 이 계층을 어떻게 대하느냐 에 달려 있다. 이 계층에 대한 소홀이나 무관심은 자비의 부족이 아니라, 신의 제1명령인 '미쉬파트'를 범하는 죄악이다. 신이 인간에게 원한 첫 번째 명령,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선은 사회의 취약 계층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신을 위한 '예배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평상시의 작은 선행이 성전에서의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다.

(2) 자비 희구(慈悲 希求)를 히브리어로 하면, '아하보쏘 헤세드'라 한다. 아하보쏘는 보편적으로 '사랑하다'로 해석한다. 특히 '인간들 간의 사랑, 즉 부부, 자녀, 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 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정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인 감정이 내포된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희구(希求)'로 번역할 수 있다. 헤세드(chesed)는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고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된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람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총애(寵愛)'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이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다. 신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신은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이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무아'의 상태로 진입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영어로 'I'm nothing'의 상태가 되어야 아가페, 헤세드의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의 생존은 바로 어머니의 헤세드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통해 헤세드가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이타적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배운다. 신은 우리에게 자기 희생적 사랑을 목표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경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의는 실천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인 헤세드는 희구하라는 명령이다. '희구하라'는 말의 뜻은 '바라서 요구함'이다. 그러니까 헤세드를 원하고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말이다. 희구의 비슷한 말은 간구(懇求)이다. 간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구함'이란 말이다. 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갈구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헤세드는 관심의 단계를 넘어선다, 그것에는 베푸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일치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아파하는 갓난 아기의 고통을 어머니도 느끼듯이 인간은 헤세드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나의 삶으로 인식한다. 신은 그런 삶이 어렵다고 판단해 헤세드를 희구하고 간구하라고 주문한다.

(3) 겸손(謙遜) 생활 :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만난 신의 명령에 따른 겸손 생활 하기'이다. 겸손은 자기 비하적인 면과 동시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리더들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이 겸손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단지 그 지극한 일부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일 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된 신을 숭배하고 그 신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생을 산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신'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신을 만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 신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善行)이라고 말했다. 그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이다. 그렇지만, 지난 금요일 아침에 공유했던 것처럼, 늘 믿음을 갖고, 기도하기 위해 그리고 탐욕을 제어하기 위해 오늘부터 성당의 미사에 참여할 생각이다. 인생의 현자들은 가급적 종교적 실천을 타인과 함께 추구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영적인 생활이 주는 큰 이익을 놓치게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유익한 종교 활동에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들과 유대감, 활동에 감사하였다. 예상치 못한 사고나 질병 등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 특수하고 잠재적인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종교 모임이 빠르고 효과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다.

나는 오늘 아침 사진처럼, 구부러진 길이 좋다. “혈구지도(絜矩之道)”, ‘나를 기준으로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자’는 말을 소환하는 아침이다. “곱자(구부러진 자, 나무나 쇠를 이용하여 90도 각도로 만든 ‘ㄱ’자 모양의 자)를 가지고 제는 방법”이라는 사전적 의미이지만,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남도 나처럼 이해하고 사랑하자”이고, 이것을 현실에 실천하자는 것이다. 그래 오늘 아침, 내가 좋아하는 시, <구부러진 길>을 다시 한 번 더 공유한다.


구부러진 길/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