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월 14일)

이론적으로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다만 기억의 배치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 속에서 영원한 현재는 없다. 그냥 지금-여기가 공간 속에 있을 뿐이다. 지금-여기가 힘드니 사람들은 시간을 비튼다. "몇 년 전부터 웹툰과 웹소설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자유롭게 여행 하는 ‘타임슬립물’의 인기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과 미래의 불안감을 동시에 내포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조하는 젊은이들에게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백영옥) . 성장이 말라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은 괴롭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이다. 시간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미래는 현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고, 과거는 현재를 기준으로 재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뜻하는 영어 단어 ‘Present’의 다른 뜻은 ‘선물’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선물은 현재이다. 두 번의 인생은 없다. 오늘이 나의 가장 어린 날이다. 오늘을 살기로 다짐하는 아침이다.
‘회빙환(回憑還)’이라는 말이 있다. ‘회귀ㆍ빙의ㆍ환생’이라는, 웹소설의 흥행 공식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사람의 몸에 깃들거나, 환생해서 복수하는 이야기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생망’ 정서 속에서, 상상을 통해서 나마 리셋하고 ‘제2의 인생'을 살아 보고픈 대중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일 게다. 마치 롤플레잉게임처럼 인생 2회차를 살게 된 주인공은 능력자가 되어 척척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수년간 웹소설에 일반화된 이 공식은 최근 리메이크 바람을 타고 TV 드라마로 옮겨왔다. 그게 <재벌집 막내아들>이다. 지난 연말부터 방학 기간동안, 넷플리스로 전회를 정주행 했다.
극 중 자수성가한 순양그룹 창업주 진양철 회장(이성민 분)은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하는 중심인물이었다. 대선후보들에게 고루 돈을 찔러주며 “전에는 내 주머니 돈을 노리는 놈이 군인 한 놈이었다면, 인자는 민간인 세 놈으로 는 게 민주화”라든지 “머슴을 키워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와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리해고 별거 아니다.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주는 거”라고 말하는 냉혹한 자본가였 다. “제일 사랑하는 자식이 순양”인 그는 자신을 빼닮은 도준을 후계자로 점 찍으면서도 도준이 가진 측은지심이 독이라고 경고한다. 입지전적 인물이자 나쁜 자본가의 전형이기도 한 진 회장에게 시청자들은 열광하였다. 드라마의 후반부에서 섬망에 시달리는 모습 등 인물에 입체적 깊이를 더하는 이성민의 탁월한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의 무한 추구가 더는 악덕이 아닌 달라진 '슬픈' 현실 세태도 읽힌다. 순양에 대한 진양철의 사랑이 너무 지고지순 순정적이라 쉽게 단죄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에는 근현대사의 명과 암. 성공한 자와 그늘에 가려진 자들. 짓밟힌 이들과 밟고 오른 이들이 겹쳐져 쌓였다.
드라마는 재벌 3세의 몸과 서민의 영혼을 가진 '재벌집 막내아들'의 입을 빌려 민주화로 포장됐지만 실은 정경유착, 권언유착이 난무했던 1990년대의 이면을 파헤쳐 주었다. 그 점을 우리 시청자들은 열광했던 것 같다. 나도 그 해부가 짜릿했다. 그러나 드라마의 결말에서 실망했다. “재벌에게 당한 도준이 그를 응징하기보다는 자기가 비판하던 재벌을 그대로 따라 하며 악행을 가린다”고 꼬집는 의견도 있지만, 재벌 비판 메시지보다 게임처럼 펼쳐지는 승계 전쟁 자체에 집중해 보는 시청자도 많았던 것 같다.
자수성가형 진양철보다 답 없었던 것은 자손들이다. 스스로 일군 것이라고는 없는 이들이 그저 혈연이라는 이유로 승계를 당연시하고,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존재라 믿는다. 그림자처럼 묵묵히 기업을 키워온 능력 있는 공신들에게도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천한 것들을 이만큼 키워주니 감히 주인한테 대들어?”
“부자 3대”라는 말에는 '부자는 망해도 3대는 먹고 산다'는 뜻도 있지만, '부자 집안이 3대 이상을 가기 힘들다'는 뜻도 존재한다. 맨몸으로 시작하여 미래를 바라보며 계속 도전하는 창업주와 달리, 자손들은 드라마 속 순양가처럼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 믿는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회사 공금을 끌어 썼다가 날려버린 고모 진화영(김신록 분, 진영철 막내 외동 고명딸)이다. 다른 사람 기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일생을 '갑'으로만 산 이들만 할 수 있는 패륜의 모습을 잘 연기했다. 그녀는 "'난데?'란 마음가짐으로 엉망진창으로 화도 내고 감정의 평균값이 없는 인물로 화영을 연기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애교를 부리고 떼를 쓰는 모습을 배역에 더했다. "조심할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의 특징"인 변덕을 부각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그는 "누구나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여러 전략을 세운다"며 "이 드라마를 찍으며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우린 어떤 태도로 결핍을 채워야 하는가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막내아들 도준은 “고모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딱 하나 고모가 순양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건 고모 능력이 아녜요. 행운이지. (창밖에서 시위하는)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행운”이라고 말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김성수 대중문화 평론가는 "응답하라 시리즈가 우리에게 1990년대를 아주 성공적인 내러티브로 던져줬지만 그 시대를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시절로 그리는 한계도 분명했다"며 "<재벌집 막내아들>은 1990년대를 추억으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깨달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바꾸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복고(Retro)'를 발견했다면 재벌집 막내아들은 '뉴트로(Newtro)'로 설명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 평론가는 "진도준의 회귀 시점이 1987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1987년은 처음으로 대통령 직접 선거가 치러지면서 군사독재라는 과거를 청산하고 민주주의가 시작된 해로 기억된다.
인수하려는 아진자동차의 고용승계를 거부하는 진양철 회장은 "머슴을 키워가 등 따숩고 배부르게 만들믄 와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리해고 별거 아이다.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주는 기다"라고 말한다. 반면 진도준은 "IMF 이후 모두가 고통 분담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가져온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힘없는 서민들만 고통을 전담해야 합니까?"라고 반발하거나 순양을 사지 말고 상속받으라는 조언에 "북쪽에서 김씨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건 그렇게들 못 참아 하면서 남쪽에서 재벌 3세가 경영권을 세습하는 건 왜 다들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어차피 자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라고 되묻는다.
몇몇 대사를 소환한다.
- 노사화합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면 회사에도 이익아닌가요? 그게 정도경영 아닙니까?
- 전두환에게 그렇게 당한 사람들이 노태우를 뽑겠어? 집단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게 아닌 이상.
-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도 변제됐나요?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하는게 그게 회복적 사법인가요?
- 상속세 문제를 처벌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상속은 본능이라고 생각하니까. 되려 그런 행운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걸 아쉬워 하겠죠.
우리 사회는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이 합당하다고 말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과 짬짜미로 돈만 버는 언론들과 법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지키려는 소위 '법 쟁이'들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게 돈이 되는기가?”(<재벌집 막내아들>)만 묻는 세상이다. 14회 엔딩에서 도준은, 대리운전 투잡을 뛰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현우를 떠올리며 “부를 상속받은 나, 가난을 대물림받은 너. 우린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서도 다른 세계에 산다. 전생과 이번 생만큼이나 먼 궤도에서”라고 말한다. 태어나 보니 한쪽은 할아버지가 진양철 회장인 재벌 3세, 태어나 보니 한쪽은 아버지가 사채를 쓰는 흙수저. 그 선명한 대비를 가르는 것은 능력주의도 뭣도 아니고 ‘운’이었다. 그리고 요즘 흔히 하는 말 대로 ‘이번 생은 망했고, 그렇다면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이 대목에서 드라마는 현실을 강력하게 소환했다. 그렇다고, <스카이 캐슬>이란 드라마가 무한경쟁의 입시 지옥도를 바꿔 놓는데 눈곱 만큼도 기여하지 못했듯, 나는 이 드라마를 시청한 사람들에게서 경제민주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드라마의 결말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국밥집 첫째 아들이 쏘아 올리는 재벌개혁의 작은 공이 될 뻔했으나, '본격 덤프트럭 조심 드라마'가 되어서 아쉽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국가 시대의 재벌 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당면 과제를 압축적으로 조명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본이 노동은 물론 가족 관계까지 장악한 현실에서 정작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묻고 또 물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바로 인간의 존엄과 행복이다.
종을 만들 때, 흔히 흙으로 틀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끓는 쇳물을 부어 식힌다. 물론 어떤 흙을 어떻게 빚어 쇳물을 받을 견고한 틀을 만드나가 중요하다. 끓는 쇳물의 온도와 어느 정도를 식힌 후에 흙으로 만든 틀을 벗겨내느냐가 종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종 혹은 그 종이 울리는 소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 종이 만들어질 때에 사용했던, 흙으로 만든 틀에 시선을 집중한다. 그래서 종소리를 단순히 종이라는 쇠가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 종이 만들어질 때 함께했던 흙의 울음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끓는 쇳물을 흙으로 만든 틀에 부어 종을 만들 때 쇳물은 식어 점점 종으로 완성되지만 흙은 뜨거운 쇳물에 의해 본디 흙으로 서의 기능을 잃고 만다. 그러나 흙은 울지 못한다. 쇳물에 타버린 "제 자식들의 덧없는 주검을/가슴에 묻어두고 삭일 뿐"이다. 대신 흙을 빚어 틀을 만들고 거기에 쇳물을 부어 종을 만든 사람을 시켜, 그렇게 만들어진 종을 ‘하늘에’ ‘걸고 치게 한다.’ 종을 치면 종이 운다. 그러나 종의 울음은 단순히 종이라는 쇠가 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리 없는 가슴들"인 흙이 "온몸으로 부서지는/소리"를 내는 것이다. 흙이 '흙수저'로 읽힌다. 드라마 탓일까?
따라서 종소리는 흙이 온몸으로 부서지는 소리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종소리/김영석
흙은 소리가 없어 울지 못한다
제 자식들의 덧없는 주검을
가슴에 묻어두고 삭일 뿐
소리를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흙은
제 몸을 떼어 빚은 사람을 시켜
살아있는 동안
하늘에 종을 걸고 치게 한다
소리 없는 가슴들
흙덩이가 온몸으로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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