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지적 인식을 위해 지금까지 개발 된 것으로 독서가 최고라 했다. 책이나 좋은 글을 읽는 것이다. 최교수는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이 독서"라고 강조한다. 문제는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요약하거나 마음에 닿는 글을 적으면서 읽어야 한다. 그런 것을 최교수는 '인격적인 단련'이라 한다. 나는 그냥 '사는 훈련', '자기-수련'이라 말하고 싶다. 그 훈련은 우선 시간을 들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적인 수고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나르( Pascal Quinard)에 의하면,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에서,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했다고 최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소개했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더 나아간다는, 즉 진화 또는 진보는 용기로 빚어진다고 했다. 프랑스어로 '봉 꾸라쥐(Bon courage)'의 말 그대로의 뜻은 "용기를 내!'이지만, '힘 내!"란 말이다. 용기는 힘을 내는 것이다. 충청도 말로는 '욕보는 일'이다. 그건 용기를 내어 시도하고 시간을 들이며 인내심으로 힘을 내는 일이다. 용기가 힘든 것은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편안함을 박차고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하여,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탈주하여, 더 나아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일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 키우고 강화하는 일로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더 많게는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옮겨 가면서 일어난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본다. "모든 진화는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탐험을 떠나는 용기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고 무섭고 이상하다. 거기는 두려운 곳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자면 두려움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모든 진화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만 일어난다."
더 나아지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갖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정처(定處)로 정하고, 마치 선정(禪定)에 들 듯이 여기에 편안해 하고 여기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또 이것을 자신만의 진리의 텃밭으로 삼는 한, 이것 다음이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닿기 힘들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장자가 말하는 '정해진 마음(成心)'에 갇혀, 이것에 맞는지 여부에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만 갖게 된다. 그러면 깊이 생각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빠지게 된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감각에 빠지만,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좋고', '나쁨'만 있게 된다. 사유에는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래야 지성이 성장한다. 지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쾌락에 빠진 사람들을 최교수는 게으른 자라고 말한다. 부지런한 자는 감각과 감정을 극복하는 지적인 태도로 사유할 줄 알면서 지성이 빛난다.
나는, 여기에, 쓴다는 행위를 덧붙이고 싶다. 나는 고미숙의 책을 통해, 사람은 왜 쓰는가? 쓴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본성과 쓰기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등을 배웠다. 글쓰기의 근본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에서 만난 "뭐든, 근본에 닿아야 삶의 기술로 운용할 수 있다"는 말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리-라이팅'을 한 후, 우리 모두와 함께 공유할 생각이다.
고미숙에 의하면, 말장난 같지만, '산다'는 것은 '선다'는 것이라 했다. (산다=선다) 우리는 두 발로 서는 데서부터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의학에서 직립에 필요한 척추를 '럼버커브'라 한다. 이건 태아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터득하는 능력이라 한다.
서는 직립과 함께 사람은 손이 해방된다. 그러니까 선다는 것은 발은 땅을 디디고 눈은 하늘을 응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발에서 벗어난 두 손이 하는 일은 무궁무진해 진다. 여기서부터 사람이 짐승과 달라지는 출발점이다. 손이 하는 일은 하늘과 땅, 머리와 다리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이자 네비게이션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선다는 건 누구든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두 발로 온 몸을 지탱하는 것, 곧 자립(自立)을 의미한다. 나는 이 자립에 큰 방점을 찍는다. 다으멩 자립에 관한 글을 한 번 쓸 생각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걸어 나가면 된다. 그게 인간의 길이다. 여기서 자립은 의식주를 홀로 감당하는 것 동시에 스스로 인생의 지도를 그려 가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걸 '생활의 자립과 인식의 지도'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인식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이다. 인식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두 발로 서려면 삶의 비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생활의 자립 그리고 생사를 관통하는 인식의 지도가 없이 두 발로 서기는 불가능하다. 그 자립 그리고 그것을 을 위해 글 쓰기가 삶의 확실한 '럼버커브'가 될 수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 블로그로 옮긴다.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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