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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머니의 마음으로 살아 가기'

222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월 7일)

오늘 아침은 노자의 <<도덕경> 제52장를 읽고 공유한다. 이 장의 제목은 "천하모(天下母)"로 하고 싶다. 덕(德)의 실천은 세상의 어머니와 닮았다는 거다. 그러니 '어머니의 마음으로 살아 가기'이다. "천하모", 즉 천하의 어머니는 태초에 모든 만물을 처음 낳은 만물의 여성이며 어머니이다. 그 어미의 마음이 도(道)이고, 그 마음의 실천이 덕(德)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존재는 "천하모"의 자식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면 자식을 알 수 있다. 자식은 어머니의 마음을 그대로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살면,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다. 인생에서 어려운 상황을 만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어머니의 마음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욕망과 세속에 끼어들면, 평생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하모"의 마음은 다음과 같다.

1. 색태폐문(塞兌閉門): 입을 막고 문을 닫으라는 거다. 여기서 "태(兌)"는 입, 입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세상 지식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의 의미로 쓰였다. 눈, 귀, 입과 같은 감각기관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본질인식과 거리가 멀다. 입구를 막고 문을 닫는다는 것은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을 지양한다는 것이다. 감각기관을 막은 후 사물을 통합적, 직관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밝은 깨달음(明)을 얻는다. 명을 얻은 사람은 존재에 대한 불안감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그래서 입을 막고 문을 닫으면 평생토록 근심이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욕망의 문(兌)를 막고(塞), 감각의 문(門)을 막으라(閉)는 거다.  욕망과 욕심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평안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거다.


2. 견소왈명(見小曰明): 조그만(小) 것에서 위대함을 볼(見) 수 있는 능력이 '현명(明)함'이라는 거다. "明", 이건 밝을 ‘명’자라고 한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明)자를 풀이하면,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명'자는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 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시비를 따지는 병폐를 고치려면 밝은 "명(明)"이 있어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일방적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는 편견을 버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동일한 사물이 이것도 되면서 저것도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거도 저것도' 본다는 말이다. 나에게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는 이 것만이라며 고집하고 그것을 절대 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이 말은 이것이라는 말은 저것이라는 말이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이것이라는 말은 반드시 저것이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이라는 말 속에는 저것이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저것을 낳고, 저것은 이것을 낳는 셈이다. 아버지만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아들 없이는 아버지도 있을 수 없으므로 아들도 아버지를 낳는 셈이다. 아버지도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고, 아들도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다. 이렇게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방생(放生)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mutual production, Interdependence이다. 그러니 언뜻 보기에 대립하고 모순 하는 것 같은 개념들, 죽음과 삶, 됨과 안 됨, 옳음과 그름, <<도덕경>> 제2장에 열거한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 것들이, 결국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어울려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달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 우려면,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사물을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인시,因是)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명,明)이다. 중세의 한철학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n)이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실재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영어로 reality, 산스크리트어의 taahta(정말 그러함, 진여), 영어의 let it be 같은 단어를 연상한다. 모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았기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통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3. 수유왈강(守柔曰强): 부드러움(유)을 지키며 사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거다. 부드러운 물이 강하고, 센 바위를 이기듯이, 부드러운 풀이 강한 바람에 견디듯이, 부드러움은 위대한 강자의 정신이라는 거다. 부드러움은 이 자연계가 운행하는 모습이다(弱者道之用, 약자도지용), 또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 "지유치빙지견(至柔馳騁至堅, 제43장)"이라 말할 수 있다.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지극히 견고한 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거다. "치빙(馳騁)"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내달리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뚫고 들어간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고, 완벽하게 제어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은 말을 제어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부린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지유(至柔)가 지견(至堅)을 제어한다고 읽을 수 있다. 마치 여자가 남자를 제어하고, 물이 불을 제어하는 것과 같다. 

 "지유치빙지견(至柔馳騁至堅)"은 제36장에 나왔던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견고한 것을 이긴다)과 같은 뜻을 갖는다. 강한 다이아몬드를 뚫고 지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한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둘 다 부서지고 만다. 물과 같은 가장 부드러운 물질이라야 다이아몬드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 나는 이것으로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는 거다. 중국 한나라의 명장 이광이 어느 날 산속을 가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쏘아 정통으로 맞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런데 바위라는 것을 알고 다시 쏘니 화살이 계속 튕겨져 나왔다. 마음속에 바위가 없는 상태, 즉 무(無)의 상태에서는 바위를 뚫을 수 있었지만 바위를 채운 상태, 즉 유(有)의 상태에서는 그것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를 뚫을 수 있는 것은 '무'밖에 없다. 왕필은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에 대해 "기(氣)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없고, 물은 스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기무소불입, 수무소불경(氣無所不入, 水無所不經)"고 주를 달았다.

"천하모"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 그 마음의 빛(光)을 발휘하여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욕망을 다스리고, 정신의 번뇌를 줄이고, 작은 것의 위대함을 볼 수 있고,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드러내며 사는 사람의 모습을 "습상(襲常)"이라고 한다. 박재희 교수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제52장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天下有始(천하유시) 以爲天下母(이위천하모): 세상이 시작하던 태초에 세상의 어머니가 있었다.  
旣得其母(기득기모) 以知其子(이지기자): 그 어머니의 마음을 알면 그 아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를 도올은 '이미 그 어미를 얻었을 진대, 그 아들도 알아야 한다'로 해석한다. 이 말은 그 어미를 알면, 그 자식을 알아야 하고, 또 그 자식을 알면 그 어미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본질을 알면 현상을 알이야 하고, 현상을 알면 그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더 나아가 철학을 알면 당연히 현재 돌아가는 세상의 형국을 알아야 하고, 세상의 형세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그 배면의 철학을 통찰해야 한다.
旣知其子(기지기자) 復守其母(복수기모) 沒身不殆(몰신불태): 그 아들의 모습을 알고, 그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 지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도는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 원리이며 도의 기본 속성은 텅 빈 무이다. 무에서 형상을 띤 만물이 태동함으로써 천하가 시작된다. 낳는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므로 천하의 시작을 어머니라고 일컫는다. 천하는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다. 자식이 다시 어머니를 지킨다는 것은 도의 원리를 온전하게 깨닫고 그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온전하고 든든한 도에 기대 살면 만사가 평화롭고 안전하다. 그래서 어머니를 지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이 문장에서 제1장에 나오는 "무명(無名), 천지지시(天地之始)"는 "천하유시", "유명(有名), 만물지모(萬物之母)"는 "이위천하모"를 연상시킨다.

塞其兌(색기태) 閉其門(폐기문) 終身不勤(종신불근): 너의 욕망의 구멍을 막고, 너의 번뇌의 문을 닫으면 평생 힘들지 않을 것이다. 도올은 '얼굴의 감정의 구멍을 막고, 아래 욕정의 문을 닫아라'로 풀이한다.
開其兌(개기태) 濟其事(제기사) 終身不救(종신불구): 너의 욕망의 문을 열고 네 앞의 일에 집착하면 한평생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도올은 '감정의 구멍을 열고, 세상일로 바삐 건너다니면, 그 몸이 끝날 때까지 구원이 없을 것'이라 풀이한다.
見小曰明(견소왈명) 守柔曰强(수유왈강): 조그만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현명이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능력이 강함이다.
用其光(용기광) 復歸其明(복귀기명) 無遺身殃(무유신앙): 네 안의 빛을 사용하여 현명함으로 복귀하라! 내 몸에서 재앙이 멀어질 것이니
是爲襲(習)常(시위습상) : 이를 일컬어 습상이라 한다.

견소왈명(見小曰明) 수유왈강(守柔曰强)에서 작고 부드러운 것은 도를 상징한다. 도를 보니 밝게 되고 도를 간직하므로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명으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밝게 깨달으면 강하게 되고, 강하면 위태롭지 않고, 위태롭지 않으므로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작은 것(小)"는 사물의 디테일을 것을 마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바라보는 심안(心眼)을 가리킨다.   습상(襲常)은 진리에 대한 이런 깨달음이 습관처럼 몸에 익어 항구적 상태에 도달한 것을 일컫는다.  습상은 늘 그러함의 도를 몸에 배게 하는 것으로도 풀이한다. 여기서 "상(常)"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형식이다. 그 형식이 "상"이다. 늘 있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다. 그래도 나에게는 습상이라는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최진석 교수의 다음 말이 조금 더 낫다. "습상"은 날카롭게 빛나는 빛(광)을 감추는 모습이다. 날카롭게 빛나는 빛을 사용하되, 그것을 명(명)의 품 안의 돌려 놓으면, 그것은 이미 경지에 이른 완숙한 모습이 될 것이므로, 어떤 재앙이나 허물도 닥치지 않게 되는 거다.

글로 삶을 배우는 것과 삶에서 말을 빚는 것이 이렇게 다르다.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쓰는 말을 표준어로 정했다지만, 그륵은 꽤나 보편적이다. 강원도와 경상도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두루 그륵이라는 방언을 쓴다. 전국의 그륵이 서울의 그릇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륵은 그릇을 채울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몸의 언어이다. 그릇의 발음은 다소곳하고 그륵의 발음은 힘차다. 그릇은 입심으로 살고, 그륵은 밥심으로 사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릇들이 그륵을 만나려면, 교양의 가면을 벗고, 몸과 맘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머니의 그륵/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