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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음악/이경임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오늘 아침은 몇일 전부터 다루고 있는 '도가구계(道家九階)', 즉 도에 이르는 9 계단을 다시 소환한다. 글을 눈으로 읽음-구송함-글의 문맥을 잘 살펴봄-글에 숨은 내용을 잘 알아들음-일을 잘 실천함-즐겁게 노래를 잘함-그윽함-빔-시원'이다. 위에서 말하는 도에 이르는 아홉 단계는 글을 읽되(①부묵, 副墨)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②낙송, 洛誦),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 핀 다음(③첨명, 瞻明),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 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④섭허, 攝許),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⑤수역, 需役),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⑥오구, 於謳).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⑦현명, 玄冥), 조용하고 텅 빈 경지(⑧삼료, 參廖)를 체험한 다음 시원(始原)의 도(⑨의시, 疑始)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여섯 단계인 오구(於謳)에 대해 이야기 한다.

(1) 여기서 '구(謳)'는 '노래하다'란 뜻이다. 오구는 사람 이름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도(道)를 즐겨서 감탄하고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임희일(林希逸)은 “오구(於謳)는 말로 부족해서 길게 노래하는 것이고, 오(於)는 감탄하는 것이니 스스로 도를 얻은 것을 즐거워함을 말한 것이다"라 풀이했다.

나에게 노래, 음악은 쉴 곳 모르는 마음의 피신처이다. 언어로 사유하고 언어로 욕망하는 우리 인간에게 음악만큼 완벽한 피난처는 없다. 언어는 가끔 사심없이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욕망과 결핍을 자극하는 폭주장치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잠시 언어에서 탈출 시켜, 선율과 리듬이 인도하는 무한한 감성의 세계로 이끄는 음악이야 말로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명곡이 된다. 어떤 음악은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지나친 욕심이 씻겨 나가고, 오직 '사랑하는 존재'로서 내 삶을 가꿔가겠다는 든든한 결심이, 불안에 휩싸인 영혼을 달래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인문 정신을 고양시킨다. 인문 정신이란 명사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을 동사 화하는 것이다. 점점 굳어가면서 명사 화되어 가는 자신을 율동감이 있는 동사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음악같은 예술이 필요하다. 예술은 명사적으로 굳어진 나를 동사화하도록 자극시켜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문적 통찰이 도달해야 할 지점이 이런 예술의 경지이다. 미학적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학적 삶이란 말을 하다 보니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이 떠오른다. 덴마크 철학자인 그가 "가치가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셋으로 구분"했다는 주장이 기억났다 1843년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한 말이다. 이를 우리는 '인간의 실존 3단계'라고 한다.

▪ 심미적인 실존: 심미적인(감각적인) 인간의 목표는 탐미를 통한 자기-쾌락이다. 자신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인 쾌락과 만족 그리고 그 만족 속에서 안주하고 싶은 탐닉이 인생의 목표이다. 그래 탐닉 시켜줄 새로운 대상을 찾으러 끝없이 배회하는 철새이다. 심미적인 인간은 자신을 고상하게 만들어 삶을 승격시켜 준다고 설교하는 철학자의 말 밑에 앉아 감탄하고,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보고 감상하거나 구입하여 자신이 그 예술가가 된 것처럼 착각한다. 혹은 예술가, 철학자, 문필가들이 태어난 그들의 고향까지 찾아가, 그들의 삶을 감탄한다. 탐미적인 인간은 미(美)를 추구하지만, 정작 자신을 미로 만들지 못한다. 체화 되지 않은 지식은 표리부동하고 얄팍하다.

▪ 윤리적 실존: 윤리적인 인간은 인생의 행복을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공동체적 삶으로 자기-탈출을 시도한다. 자신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행복한 만큼, 자신에게 가까운 가족 그리고 친구, 더 나아가 같은 동네에 거주하는 주민의 안녕을 인생의 중요한 임무로 여긴다. 윤리적인 인간이나 도덕적인 인간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탈출하려는 무아(無我)를 연습하기 위해, 자신에게 쌓여 있는 이기심이란 적폐 제거를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자기-중심에서 탈출하여 우리-중심, 더 나아가 타인/생명 중심으로 삶의 전환은 일시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이, 그 자신의 본성과는 떨어질 수 없는 거룩한 습관이 될 때 가능하다. 윤리적 인간은 언제나 구별되고 그 자체로 향기와 빛을 내는 인간이다. 그러나 미적인 인간이나 윤리적 인간은 너무도 인간적인 몸부림이다. 그런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 다음 단계의 삶은 종교적 삶이다.

▪ 종교적 실존: 종교적 인간은 미적 인간이나 윤리적 인간에 대한 극복이며 초월이다. 여기서 종교라는 말은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이끌어주는 통로서의 체계이다. 종교적 인간은 자기-초월을 추구하며,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는 인간이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은 나비가 자신이 고치에 있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새가 자신이 알에서 지내던 시간에 대한 추억이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자신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 준, 어머니 뱃속 10개월을 모른다. 나는 전적으로 내 힘으로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어머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힘으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탐미적이며 정신적인 쾌락과 보람으로부터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 포기가 희생(犧牲)이다. 이 희생은 자신하고는 상관 없지만, 자신의 생명을 헌신할 정도로 거룩한 가치를, 자신의 삶을 통해 창조하려는 용기이다. 이 용기가 종교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순교(殉敎)이다. 희생을 프랑스어로 la sacrifice라한다. 접두어 sacre가 거룩을 의미한다. 순간을 사는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을 때, 비로소 거룩하고 온전한 개인이 된다.

너무 멀리 왔다. 여기서 오늘의 시를 한 편 읽고, 서사의 힘을 위해 신화 속에 나오는 음악 이야기를 한다. 오늘 사진 동네 공원에서 찍은 것이다. 억새가 오후의 빛을 받으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음악/이경임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
망가진 것들에게서 나오네
몸 속에 구멍 뚫린 피리나
철사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
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
비비 꼬인 호론이나
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
분칠, 먹칠한 토막뼈투성이 피아노
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견고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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