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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노희경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코로나-19는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의 틀과 그 문법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 문법이란, 인간이 풍요로운 삶을 위해 지혜를 모아 마련한 기존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와 해체일 수도 있다. 이 감염병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가능하지 않다. 우선 생존하면서 그 대안을 조용히 모색할 시점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숙고를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야한다.

이름도 처음인 '2,5 생활 속 거리두기' 이후, 내 핸드폰으로 걸려 오는 전화가 없다. 늘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았던 내가 사람들이 그립다. <복합와인문화공간 뱅샾62>도 늘 오던 사람들이 안 오니 일상이 아니라, 이상하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코로나-19와 함께 등장한 신조어가 많다. 가장 자주 쓰는 ‘언택트(untact)’는 접촉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에 부정 접두사인 언(un)을 조합한 말이다. ‘비대면’ ‘비접촉’이라고도 한다. ‘온택트(ontact)’는 여기에 온라인을 통한 연결(on)을 합성한 용어다. 비대면 그룹 소통 방식을 의미하는 ‘인택트(interactive untact)’까지 나왔다. 셋 다 한국식 영어인 ‘콩글리시’다. 일각에서는 이런 변화를 대변하는 용어에 언택트, 비대면, 비접촉 등의 부정어보다 긍정어를 쓰자고 제안한다. 박수용 서강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언택트와 비대면을 ‘디지털 콘택트’와 ‘디지털 대면’, 이를 아우르는 축약어로 ‘디지택트(digitact)’를 쓰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게 새로운 경제와 산업에도 이롭다는 얘기다.

나는 여기에 로컬텍트(localtact)를 보태고 싶다. 나는 이걸 다시 '골목텍트' 또는 '마을테크' 바꿔 부르기도 한다. 슬리퍼를 신고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이동해, 익명이 아닌 다 잘 아는 신뢰가 가는 소수는 만나야 한다. 사람은 만나야 살맛이 난다. 그 뿐만 아니라, 인류학자 애슐리 몬터규는 서구 문명의 문제 중 하나를 미각, 후각, 촉각 같은 '근접감각'보다 시각, 청각 같은 '원격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인간은 다양한 감각 언어를 사용하고 소통하고 그 중에서도 촉감은 서로 다른 몸을 가진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등의 경험세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 디지털 대면이라는 환경은 우리가 오감을 통해 경험했던 세계를 축소하고, 시청각이라는 원격감각에 점점 더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다. 문제는 이 원격감각이 폭력에 대한 반응을 둔화 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 성폭력이 확산일로를 거쳤던 이유 중 하나는 화면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청각만으로는 실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 속 거리두기로 시간이 많으니, 오늘 아침은 내가 좋아하는 긴 시를 공유한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라고 강조하는 노희경 시인의 시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의 나무 같아서는 안 된다. 가시를 다 떼어야 한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노희경

지금 사랑 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 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 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 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하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 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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