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8월 13일)

노자 <<도덕경>> 제37장은 전반부의 마지막 장이다. 여기서 노자는 도의 특성과 운행원리를 다시 한 번 압축해서 보여준다. 도는 결코 억지로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다고 세상에 안 된 일이 하나도 없다. 사실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런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에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풀이하여야 한다. '무위이불무위(無爲而不無爲)'를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부족하다는 말이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면 그 의미가 부족하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나에게는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를 "도는 늘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풀이한 도올의 해석이 좋다.
최진석 교수는 무위(無爲)를 '정교한 인위(人爲)'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제 <인문 일지>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 차원에서, '무위'는 오랜 연습과 훈련, 시행착오와 수정, 혹독한 자기점검과 자기변화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일 수도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행운이 찾아 올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그릇이 마련되지 않아, 금방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불행이다. 이어지는 제37장>의 정밀 독해는 블로그로 옮긴다.
매주 금요일은 노자 <도덕경>을 함께 읽는데, 이 번주는 모두 바쁜 일정으로 그냥 넘어갔다. 나 혼자 <<도덕경>> 중 <도경("길의 성경"> 마지막 두 장을 읽으며 휴가기간을 교요하게 보냈다. "不欲以靜(불욕이정)하니,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이 되었다. 무욕(無慾, 욕심이 없고 고요하게 되니, 천하는 저절로 제 자리를 잡는다는 말처럼, 마음이 평화롭다. 아침마다 딸과 집 옆 운동장에서 맨발 걷기를 하니, 몸도 새 기운을 얻어 힘이 솟는다.
오늘 아침 사진은 아침 운동 길에서 만난 나팔꽃이다. 이 꽃만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안도현 시인은 "메꽃과 나팔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팔꽃은 외국에서 들여온 꽃이지만, 메꽃은 우리나라 산천 어디에서나 스스로 자란다. 나팔꽃 잎사귀는 둥근 하트 모양이지만, 메꽃 잎사귀는 길쭉한 쟁기처럼 생겼다. 들길에서 나팔꽃과 비슷한 연분홍 꽃을 만났다면 메꽃이라고 보면 된다. 시집살이로 고생하는 며느리를 “기름진 밭에 메꽃 같은 며느리”로 위로하는 조선시대 시조도 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메꽃과 호박꽃을 들기도 했다. 키 큰 명아주 줄기를 타고 메꽃이 한 송이 불을 밝혔다. 그 존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참으로 아득한 것이다. 무욕 무취의 세계는 메꽃을 닮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이 메꽃과 나팔꽃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나팔꽃/정호승
한쪽 시력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쓴다. 길게 이어지는 사유는 나의 다음 블로그를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무위 도식'이 아니다. 의식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자연스럽고 과장되고 지나치고 쓸데없고 허세르 부리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든 행위를 '하지 않음'이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고 속 깊은 데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행동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위- 함이 없는 함 - 이다.
"만물장자화(萬物將自化)", '만물이 장차 스스로 아니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함이 없는 함'이야말로 위대한 행동으로서 자연스럽게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이런 경지에 이를 때 '만물이 저절로 변한다'는 거다. 이건 치술(治術)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마음공부이기도 하다. 노자는 "자화" 다음에 "화이욕작(化而欲作)"을 말한다. 이 "화이욕작"을 도올은 "그런데 스스로 교화 되는 과정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또다시 치솟을 것"이라 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라는 것을 노자는 확인하고 있는 거다. 무위의 치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잘 되어 가던 일이 뒤틀리어 산통(算筒, 맹인이 점을 칠 때 쓰는, 산가지를 넣은 통)이 깨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뭔가 억지로 일을 꾸며 그럴 듯한 공적을 쌓고 남보란 듯 살아 보겠다고 설치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적이고 이기적인 동기가 마음 한 구석에 조금이라도 있는 한, 일이 모두 허사가 되거나 냄새나는 일이 되고 만다. 결국 '자기'라는 것이 없어지므로,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자기가 하는 일이라는 의식이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우리는 이렇게 자유스러운 경지에서만 노닐 수 없다. 이른바 '유혹'이 언제나 따른다. 뭔가 그럴 듯한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을 '그냥 놓아 둔다는 것'이 어딘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저절로 됨'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스스로 달려들어 개입하고 조절하려는 욕망이 생긴다. 자기 과시욕망이 생기는 거다. 이럴 때, 노자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樸)'로 이런 욕망을 누르라고 한다. 이 '다듬지 않은 통나무'가 도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도의 행동 방식을 본받아 우리의 욕심을 누르라는 거다. 이렇게 해서 욕심이 없어지면, 고요함(靜)이 깃들게 된다는 거다.
"무명지박(無名之樸)"을 '다듬지 않은 통나무'라 했지만, 말 그대로 하면, '이름 없는 통나무'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분별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 저것이라고 분별하면, 다시 말해 이름 지어지면 그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면 한계 지어진다. 이 말은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한계 짓지 않고 스스로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를 아는 사람이라는 거다.
도(道)는 늘 있는 그대로이며, 억지 행위와 분별 만상이 전혀 없는 거다. 도가 보여주는 무위(無爲)를 굳게 지키고 있으면, 만물은 온갖 경계가 사라지고 자기 자신과 일체가 된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거다. 이 상태에서 분별 망상이 일어나려고 할 때는 즉시 이름 없는 순수함(樸)의 자각으로 덮어 누른다. 무욕(無欲)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거다. 그 무욕의 경지는 욕심이 없어지며 불욕(不欲)의 상태에 이른다. 그러면 만물은 경계가 사라지고 저절로 질서를 찾아 안정될 것이라는 거다.
다음은 제37장의 원문과 번역이다.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제후나 임금이 능히 이를 지키면, 만물이 장차 저절로 이루어진다.
化而欲作(화이욕작)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인위적으로 뭘 도모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이를 진압한다.
無名之樸(무명지박)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이름 없는 통나무로 욕심을 없애니, 욕심이 없으면 고요하게 되고, 천하는 저절로 제 자리를 잡는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윤동주 (0) | 2022.08.16 |
---|---|
가지 않은 길/프로스트 (0) | 2022.08.16 |
박수소리 시대정신 (0) | 2022.08.15 |
인문운동가의 시대정신 (0) | 2022.08.15 |
별을 보며/이성선 (0) | 2022.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