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8월 12일)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도덕경>> 48장)가 오늘의 화두였다. "배움의 목표는 날마다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다. 도의 목표는 날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도에 힘쓰는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여기서 도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면, 나이 들면서 조금씩 버리고 덜어내는 것이 사람 답게 잘 사는 길로 받아들이는 아침이다.
아침 맨발 걷기를 하며, 유튜브로 우주의 기원부터 생명 현상을 거쳐 인간 의식의 출현으로 이루어진 문화 현상까지 공부하느라고 "위도일손"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덕경>> 중 <도경>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무위(無爲)"를 만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 아침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매일 비우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48장에 나오는 말이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취천하상이무사,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이다.
이 말을 번역하면, "배움이라 함은 나날이 더하는 것이고, 도라 함은 날마다 던다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무위(無爲)에 이르게 된다. 그 '무위'는 하지 못하는 것("불위, 不爲")이 없다. 천하를 얻으려 한다면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일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없다."
비우며 살자. 욕심내지 말자. 그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無爲)가 아니라 무불위(無不爲, 되지 않는 일)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롭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장자가 <인간세>에 말한 "安時而處順(안시이처순)하면, 哀樂不能入也(애락불능입야)다." 주어진 시간, 아니 태어난 때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도리, 순리 따르면, 일상의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어들 수가 없다는 거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 생각이다.
어떻게? 한 방법론을 오늘 아침 소설가 백영옥의 글에서 알게 되었다. "문제는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내가 권유하고 싶은 건 목표를 가능한 한 작게 쪼개라는 것이다. 먼 ‘미래’를 ‘현재’로 끌어와 눈앞에 두고 살펴보란 뜻이다. 20대라면 토익 900점 이상, 취업, 결혼 같은 큰 목표가 아니라, 내 방 정리, 영어 문장 5개 외우기처럼 해야 할 일을 쪼개어 포인트처럼 적립하라는 것이다. 목표를 쪼개는 이유는 성취의 문턱을 낮춰 잦은 성공의 경험을 느끼고, 자기 효능감을 키우기 위해서다. 라이프 코치들이 꼽는 최고의 습관이 ‘침구 정리하기’인 이유도 그것이 하루를 성공의 경험으로 열게 하고, 청결함을 넘어 ‘나는 정리 정돈하는 사람’이라는 새 정체성을 주기 때문이다.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때, 우주도 우리의 꿈에 귀 기울인다." (백영옥)
우리는 자기가 맡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직업 인들의 반짝이는 얼굴에서 감명을 받는다. 나도, 그들처럼, 하루 중에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일이 끝나면 죽는 거다. 오늘 아침 사진의 모과나무처럼, 그러다 쌓인 "흉터"를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흉터/네이이라 와히드(얼굴 없는 시인으로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시인)
흉터가 되라.
어떤 것을 살아 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쓴다. 길게 이어지는 사유는 나의 다음 블로그를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사진하나_시하나 #네이이라_오히드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위도일손 #무위이무불위
도를 닦는 것은 나날이 지식 또는 분별을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덜어내어 비움이 지극해지면, 평화로워 지고 무위하여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지식은 밖에서 오고, 도는 안에서 온다. 여기서 도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면, 나이 들면서 조금씩 버리고 덜어내는 것이 사람 답게 잘 사는 길이라는 말로 들린다.
나는 '무'를 '없음'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지운다', '버린다'라는 동사로 본다. 그냥 없애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비우거나 버리는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도 새롭게 해석이 된다. '무소유'란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기 위해 버린다는 적극적인 실천적 의미를 갖는 거고,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물건의 물성(物性)을 유지시키는 적극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무위'에서 '무(爲)'가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 무어라 해도 살아있다는 거다. 그리고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서 '위(爲)'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서 죽을 때까지 위(爲), 즉 함(doing)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위'는 '함이 없음'이 아니라, '무(無)적인 함'을 하는 것이다. 도올의 멋진 설명이다. "생명을 거스르는 '함'이 아닌, '우주생명과 합치되는 창조적인 '함'이며,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어긋나는 '망위(忘爲)가 없는 함'을 하는 것이다.
노자는 세상사 인위적인 ‘모든 일을 이뤄지게 하는’(無不爲) 방법으로서 ‘무위’를 주장하였지, 그냥 자체의 가치 때문에 ‘무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무불위’의 최종 목적지는 ‘천하를 차지’(取天下)하는 것이었다. 노자는 천하 경영이라는 야망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다.
최진석 교수는 '일부러'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인위적인 작은 활동을 '일부러' 하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어본다. "퇴행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지식보다는 지혜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지식을 무시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오해한다. 인위적인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로 오는 선물을 착각하면 이렇게 된다. 지식을 쌓는 인위적인 노력을 부단히 하면, 자신이 가진 야망의 강도에 따라, 어느 순간 선물처럼 오는 것이 지혜다. 지식이 지혜로 바뀌는 순간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계기는 야망의 강도나 순도다. 진실하고 강한 야망의 인도를 받아 지식이 생산력과 적응력을 발휘하면 지혜가 된다. 우리는 그저 야망을 품고 지식 섭취라는 인위적인 작은 활동을 꾸준히 ‘일부러’ 하면 된다."
도란 기본적으로 무위(無爲)다. 인위적으로 뭔가를 도모하지 않는다. 도는 외부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저절로 존재하고, 저절로 드러나고, 저절로 순환한다. 도에는 어떤 욕망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욕망이란 그 자체로 유위한 것이다. 인위가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도는 자연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은 누가 지시하거나 명령해서, 원해서, 욕망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간섭도 통제도 관리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
도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자연 현상인 하늘의 구름을 보라. 그것을 압축시키거나 수축시키는 장치는 그 어디에도 없지만 구름은 못 하는 것이 없다. 저절로 뭉쳐지고 저절로 비가 되어 내린다. 그리고 만물을 적시고, 만물을 키운다. 인위적으로 구름을 더 짙게 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이다. 자연의 노여움만 초래할 뿐이다. 핵무기가 폭발한 이후 형성되는 짙은 구름이 인간에게 재앙을 불러오듯이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욕심을 부리면 자연은 질박한 통나무를 무기로 써서 그 욕망을 억제 시킨다. 질박한 통나무란 도의 원리, 자연의 순리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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