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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

난 솔직히 고(故) 김종철 교수님을 잘 모른다. 그저 신문에서 그분의 글을 가끔씩 재미있게 읽고, 큰 통찰을 얻곤 하던 기억 뿐이다. 정희진 선생은 고 김교수님에게서 인생을 배웠다고 말한다. 나도 또한 흔들리는 장마철 아침에 눈이 크게 뜨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이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나는 내 삶 또한 언제나 임시방편이었고, 잘못과 민폐를 반복했었다. 지금이야 좀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애써 그러지 않은 척 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정희진 선생이 깨달은 것처럼, 머리에 불이 번쩍 일어났다. 정선생의 말이다. "김종철 선생님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나는 “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다짐했다."

"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일만 하자" 세상에 이름을 새기는 "빅 스토리"에 목을 매지 말자.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 인간은 돈이든 명예든 타인의 인정이라는 의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을 쓰다가. 친구 김래호의 담벼락을 읽었다. '많은 저녁(다석, 多夕)'이라는 호를 가지신 류영모 선생님의 말을 소개했다. "우리가 빛 빛 하지만 빛보다 어둠이 더 크다. 깬다 깬다 하지만 깸 보다는 잠이 먼저이다. 삶도 죽음이 먼저이고, 많음 보다 하나가 먼저이다." 이 말이 다음과 같이 한자로 전해진다.

적여시광(寂餘始光)
수여시가(睡餘始覺)
사여시생(死餘始生)
일여시다(一餘始多)

이 네 구절은 우리가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라고 여기는 "빛, 깸, 삶, 많음"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위대한 것, "어둠, 잠, 죽음, 하나"임을 밝혀 놓은 역설의 문장이다.
- 나는 빛이 어둠을 이긴다고 배워 왔다. 그래 한참 생각한 후 깨달었다. 도시문명 속에서는 확실히 빛이 강해 보인다. 그러나 우주의 어둠 속에서는 빛은 미약하며 순간적이다. 소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소리가 적막을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침묵과 고요한 적막 뿐인 절대공간에서 소리는 맥을 못 춘다.
- 깨어 있는 것도 잠들어 있는 것에 비하면 일부분일 뿐이며, 잠깐일 뿐이다.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지 않은 깸은 깸이 아니다.
- 살아 있는 것 또한 죽음의 상태에서 생겨나 잠깐 뒤엔 다시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 세상에 나와 있는 만물들은 번성하여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신의 '하나'가 이뤄낸 많은 것일 뿐이며 죽으면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많음이 하나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심오하다. 내 이름이 '한표'인데, 사람들은 '만표' 또는 '천표'로 바꾸라 한다. 그러니 '만표'도 다 '한표'에서 나온다. 억지인가?

다음 말을 하려다가, 류영모 선생님의 이야기로 흘렀다. "죽음을 염두에서 잃어버린 순간, 타락은 필연이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삶과 죽을 운명이라는 두 가지 조건의 길항에서 나왔다. 근대 문명에 이르러서는 이 ‘갈등의 균형(생각하는 능력)’은 박살 나고, 죽음은 자연사(自然事)가 아닌 삶의 대척에 서게 되었다."(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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