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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심순덕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7월 19일)

'신발이 맞으면 발을 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보면 언뜻 알 것 같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신발이 맞으면, 발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상구의 <<그때 장자를 만났다>>에서 얻은 생각이다.

이 말은 <장자> 외편 "달생" 11에 나오는 말이다.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知)가 시와 비(선과 악)의 판단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대상과 꼭 맞기 때문이다. 마음에 동요가 없고, 외물에 끌려가는 일이 없는 것은 일이 기회에 꼭 맞기 때문이다. 대상과 꼭 맞는 데서 시작하여 어떤 경우에도 꼭 맞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은 그 알맞음도 잊어버리는 자적(自適)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忘足, 履之適也 ; 忘要, 帶之適也 ; 知忘是非, 心之適也 ; 不內變, 不外從, 事會之適也. 始乎適而未嘗不適, 忘適之適也"(망족, 이지적야 ; 망요, 대지적야 ; 지망시비, 심지적야 ; 불내변, 불외종, 사회지적야. 시호적이미상부적자, 망적지적야)"

신발이 작아서 발이 아플 때, 혹은 신발이 커서 자꾸만 벗겨질 때, 우리는 발을 의식한다. 허리띠가 커서 바지가 흘러내릴 때, 또는 허리띠가 작아서 숨을 못 쉴 때, 우리는 허리를 의식한다. 그래 필요한 것이 적재적소이고 적재적시이다 그게 안 이루어지면 불편하다.

그리고 내 발에 맞지 않는 남의 신발을 신고 걷는 순간 걸음마다 고통스러워 그제야 발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신발은 우리 인간의 정체성이다. 내 신발을 , 내 정체성을 지니고 가장 '나' 답게 살 때, 발의 존재를 잊게 해주는 익숙한 내 신발이 내게 가장 고마운 신발이다. 소중한 것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주변에 어디에 든 있다. 그런데 그 소중한 것을 모르고 사는 경우가 있다. 신발이 맞으면 발을 잊고, 발을 생각하지 않는다. 허리띠가 맞으면, 허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고마움 마저 잊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편안한 것이다. 물론 적재적소(適材適所), 적재적시(適材適時)에 있는 주변의 것들에 고마움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때 편안함은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직무유기나 불성실을 명분으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오히려 불편하다. 육체적 편안함도 익숙해지면 무뎌 진다. 안일한 일상은 다시 번뇌와 망상으로 복잡하게 얼크러진다. 진짜 편안한 상태는, 신발에 문제가 없어 편안하면 발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으며 허리띠에 불편함이 없으면 허리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외부 사물 세계가 개인의 의식에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이나 비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아무 것도 의식되지 않는 상태, 자기가 없는 것 같은 상태, 곧 주체와 객체, 외부사물과 자신의 분리나 차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상태이다. 요약하면,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대상과 관계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편안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장자>은 이런 상태를 무기(無己), 오상아(吾喪我), 망기(忘己)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이런 상태가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자아소멸 상태이다. 장자가 부정했던 자아는 본질적 의미에서의 자아가 아니라, 외부사물로 인해 소외되고 대상화되는 자아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자기를 잊거나 버리는 행위는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되찾는 것이다. 자아를 잊거나 잃은 상태는 왜곡된 자아의 현실을 부정하고, 대상적 자아의 한계를 초월함으로써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조화로운 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관계속의 자아이다. 이렇듯 '나 없는 나'의 상태는 고립이나 은둔을 통해서 도달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나 사물과의 온전한 소통과 교감을 통해서 달성된다. 따라서 대상과 온전한 소통과 교감하는 능력,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는 능력을 키움으로써 온전히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서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장자는 망기(忘己)나 오상아(吾喪我)의 경지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자기가 의식되지 않는 경지의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로 제시하는 것이 또 있다. 그건 안명론(安命論), 무위(無爲) 그리고 부득이(不得已)함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명론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생명의 보존과 삶의 향유를 내포한 개념이다. 세속적 가치나 목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손상시키고 삶을 고단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자연의 섭리에 충실히 따르는 삶의 가치와 필요를 강조하는 것이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본다. <장자> 내편 "대종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샘물이 말라 물고기가 땅 위에 모여 서로 물기를 끼얹고 서로 물거품으로 적셔 줌은 드넓은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만 못하다. 요임금을 칭찬하고 걸왕을 헐뜯기보다는 둘을 다 잊고 도에서 변화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 泉涸(천학),: 魚相與處於陸(어상여처어륙), 相呴以濕(상구이습), 相濡以沫(상유이말), 不如相忘於江湖(불여상망어강호) : 與其譽堯而非桀也(여기예요이비걸야),不如兩忘而化其道(불여량망이화기도).

물고기가 가끔씩 모래사장에 떠밀려 올라올 때가 있다 부지런히 물을 부어주면서 수분을 유지시켜주는 게 중요하지만, 1분 1초라도 서둘러 바다로 돌려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 물고기가 고마워해야 하는 대상은 육지로 떠밀려 나왔을 때 물을 부어주는 인간이 아니라, 평소 그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던 바닷물 자체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우리에게 당연한 것들이, 예컨대 공기처럼, 정작 없어지면 1분도 못 살면서 사는 동안 그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존재를 의식할 때면 불만을 토로할 때이다. 예를 들면, 미세먼지로 투덜거릴 때이다. 공기가 맑을 때는 공기가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 마치 오늘 공유하는 시에서 처럼, 우리들의 엄마가 그랬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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