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7월 7일)

오늘 아침 화두는 시시한 삶이다. '시시하다'라는 말은 '신통한 데가 없고 하찮다'는 말이다. 아니면 부정적으로 '좀스럽고 쩨쩨하다'는 말로도 쓰인다. 인생의 대부분은 시시하다. 어쩌면 만족스러운 삶이란 인생의 대부분을 이루는 시시한 순간들을 행복하게 보내는 데 있지 않을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시시하게 살면 행복하다고 본다. 여기서 '시시'가 무엇인가? 한가로운 것이다. 비록 몸은 부지런해도 잠재의식이 한가롭다면 시시할 수 있다. 이때 잠재의식이 한가로우려면 행동은 단순하고 소박해야 한다. 기대하고 바라는 게 적어야 한다. 그러니까 부지런하지 않으면서 한가로운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 몸이든, 의식이든, 행동이든 모두가 한가해야 행복해진다. 그러니까 시시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가로우면 행복해지는 거다. 우리가 지금 힘든 것은 다들 바쁘고 여유가 없는 탓이다.
시시하고 싱겁고 재미없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시시하고 특별한 것이라곤 하나 없는 일상(日常)이 감사의 기본이다. 일상의 지루함을 탈출하기 위해 일탈(逸脫)을 꿈꾸지만, 일상이 깨지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그건 불행이다. 시시하다고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반복적이다 보니 파격적이지 못할 뿐이다. 일상은 시시하다 그리고 식상하다. 그러나 시시하고 식상한 것은 보통 우리 곁에 있다. 왜냐하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더 소박하게 살라."(채현국) 아인슈타인도 그랬다. "조용하고 소박한 삶은 끊임없는 불안에 묶인 성공을 좇는 것보다 기쁨을 가져다 준다." 조용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
그런 삶이 내가 최근에 읽고 있는 노자의 <<도덕경>>이 말하는 노자적 삶이 아닐까? 노자가 말하는 도(道)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세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만져지는 것보다 더 세다. 도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고, 가장 만져지지 않는 것이다, 가장 높아서 가장 세다. 따라서 노자는 '도'를 억지로 개념화하여 '크다(大)'고 하였는데, 이 '크다'는 말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전체 우주의 존재 원칙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전체는 가만히 있는 정지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부단한 운동 속에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 빠뜨리는 곳이 없는 부단한 운동의 방향은 먼 곳을 향하여 있는데, 이는 어떤 극한을 향하여 간다는 뜻으로 보았다. 사물의 발전은 극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그 극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전체 자연의 운행 모습이었다. '대(大)→서(逝)→원(遠)→반(反)'은 전체 운행의, 즉 도의 운행을 나타내는 전략 아래 동원된 유기적 의미 연관 고리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 어떤 것도 '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득도(得道)의 길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가까운 것과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영역에 가까운 쪽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면 된다. 예컨대, 구체적인 것보다 추상적인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도에 먼 쪽의 것이 보내는 유혹을 이겨내고, 가까운 쪽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를 발휘하여 도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는 승리를 한 번 경험하면서 우리는 점점 우주적 삶의 경지로 이동한다. 결국 우주적 삶은 모순적 상황에 처한 매우 미미하고 고독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하는 그 찰나적 순간에서만 피어난다. 이 용기가 여기 멈춰 있는 나를 저기로 건너가게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노자는 이런 상황을 "습명(襲明)"이라 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자기는 여지없이 깨지고 알지 못했던 곳으로 도달해간다. 여기 있는 자기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저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미미한 자신에게 '그렇다면 나는?'이라는 질문을 계속 해대면서 일상에서 작은 승리를 경험 시키는 일이 바로 우주적 삶이다.
도에는 "여식췌행"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 미니멀리즘이 도를 닮은 행동이다. 원문은 이 거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봄을 앞당기려고 겨울을 짧게 하지도 않고, 앞서 가는 물을 추월하려고 덜미를 잡지도 않는다. 자연처럼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스스로를 드러낸다 거나, 스스로 으스대고 자랑하는 행동도 자연스럽지 않다. 노자는 이러한 것을 "여식췌행", 즉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과 같다고 말한다.
인위적인 단계를 넘어 도와 하나된 경지에 이르면, '나'라고 하는 것은 없어지고, '도'만 있는 상태이므로 결국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도가 하는 일이 되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인위적인 흔적이나 흠은 사라져 버린다는 거다. 그게 오늘 아침 내가 바라는 시시한 삶이다. 그게 또한 노자적 삶이다.
셈을 잘 하는 사람, 잘 닫힌 문, 잘 매진 매듭도 같은 맥락의 비유다. 셈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계산기가 불필요한 군더더기이며 잘 닫힌 문에게는 빗장이 불필요한 잉여다. <<도덕경>> 제24장에서 나온 것처럼, 도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것들은 '여식췌행(餘食贅行)"인 것이다. 자연은 선풍기가 없이도 바람을 잘 일으키며, 물레방아가 없어도 물을 잘 흘러가게 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선풍기와 물레방아는 자연에 덧댄 군더더기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단순하게 정리해야 한다. 오늘 아침의 시처럼 말이다. '사막'은 흔히 생명이 살아가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그 안에 있는 모래알들은 각자가 외롭지 않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또 서로 너무 간섭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있다. 우리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래'를 '사람'으로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무수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이 형성되고 각각의 관계 속에서 적당한 '사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것이 과열되어 있는 오늘날 '사이'를 유지하며 건전한 인간관계를 이어 나가는 일은 쉽지 않다.
'사이'가 없다면 사막은 모래마저 숨 쉬지 못하고 썩는 곳이 될 것이다. 인간도 각자의 관계 속에서 '사이'를 만들어 나가며 숨 돌릴 곳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를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일상에 필요한 '틈'으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잠깐 씩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필요하다. 우리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적 사이'인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발버둥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 쉬고 세상을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멋진 시를 만났다. 진은영 시인의 <<시시(詩時)하다-진은영의 시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책에서 만난 시이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무엇이든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때가 종종 있다. 거리두기는 힘든 상황에서 잠시 쉬어 가는 도피처가 될 수도 있고 상황을 객관 화 시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사막/이문재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지난 5일은 국제수학연맹(IMU)이 대수기하학을 통해 조합론의 오래된 난제들을 해결한 공적을 인정해 허준이(미국 프린스턴대와 한국고등과학원) 교수를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팔즈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SNS를 도배했다. 그가 비록 미국 국적자이지만 초등학교부터 석사과정까지 한국에서 마친 만큼, 국내 언론들은 한국 교육이 일궈낸 '성취'로 큰 경사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나는 허준이 교수가 자랑스럽다. 축하한다.

허 교수는 "수학은 자유로움을 학습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렸을 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훈련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수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조언했다. 학원과 과외, 논문을 쓰고 과목별 PT까지 방송광고에 나오는 나라에서 자퇴를 경험하고 뒤 늦게 수학을 전공했으면서도 필즈상을 수상한 허 교수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이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라는 영화를 알게 되었다. 이영화는 자신의 천재성이 무기 만드는데 사용 되는게 싫어서 남한으로 건너와 숨어 지내던 북한의 천재 수학자 이학성이 자신이 소사로 일하고 있던 자사고에서 우연히 만난 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이야기라 한다. 이 영화의 결말 즈음 이학성은 자신의 제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강당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데 "수학이 무기 제조에만 쓰이는 게 싫어서 남한에 왔는데, 남한에서는 입시에만 수학이 쓰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언제 이 여화를 찾아 보고 싶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의 성취에는 유명 대학 교수 부모 아래서 스스로 잠재력을 시험해 볼 기회가 열려 있었다는 점과 순탄치 않은 이력이 학자로서의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그의 수상은 아동학대에 가까운 한국의 영재교육과 선행 학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돌아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실제로 인터뷰에서 허 교수는 "내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이 적어도 내겐 최적의 경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 이미 고교 과정까지 공부해 두지 않으면 큰일 날 듯 조바심 내는 우리 부모들은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허교수가 일본의 세계적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1970년 필즈상 수상자) 교수를 만나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 점이다. 역시 선생이 중요하다. 해외 석학을 한국에 초빙하는 교육 지원 프로그램이 효과를 본 것이다. 허 교수에게는 놀라운 우연 혹은 운명이 된 거다.
그리고 허교수의 부모에게 박수를 보낸다. 무엇보다도 똑똑한 아들이 자퇴와 휴학을 반복하고, F학점으로 가득한 성적표를 받아오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참고 기다린 부모가 존경스럽다. 그리고 뒤늦게 발동이 걸리는 슬로 스타터들에게 기회를 주는 학교 문법이 마련돼야 한다. “시작하기에 늦은 건 없다”는 허 교수의 수상 소감이 큰 울림으로 남는다. 국화빵 찍어 내는 듯한 현행 교육시스템을 개편하고 기초학문에 투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끝으로 그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과를 말하는 부분이 좋았다.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거의 똑같다. 오후 9시쯤 자녀들과 함께 잠을 잔다. 새벽 3시쯤 일어난다. 그땐 아무 음악도 틀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조깅을 한다. 오전 6시가 되면 오늘 하루를 준비한다. 곧 자녀들이 일어나면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교육기관에 데려다 준다. 그런 뒤 오전 9시에 학교에 도착해 연구하는 데 오전 시간을 다 쓴다. 점심 식사를 한 뒤, 낮잠을 한 번 잔다. 그리고 이메일 보내기, 수업 준비 같은 일을 끝낸 뒤에 오후 5시에 퇴근한다. 필즈상을 받은 후에도 이 일상이 많이 바뀌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특별한 취미 없이 하루 4시간가량만 연구에 집중한다. 나머지는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집 안 청소를 하거나 아이들 공부를 봐주기도 하며 머리를 식히고 다음 날 다시 공부하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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