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여러 가지 일로 머리가 복잡하다. 중요한 것은 물 흐르는 대로 그 물결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이기심을 버리는 일이다. 무위(無爲)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17장을 보면, 가장 훌륭한 통치자는 있다는 사실만 아는 자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친밀하게 느끼며 찬양하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두려워 하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비웃는다. 4 단계이다. 최고의 리더는 "무엇을 해도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기"(제2장)를 하는 자이다. 통치자가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강하게 무장하여 그것을 백성들에게 반드시 실행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통치의 주도권이 통치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을 때라야 그려질 수 있는 풍경이다. 이는 신뢰(信賴)의 문제이다.
영화나 모든 예술이 다 그렇다. 예술가가 예술 향유자의 수준을 믿어야 한다. 신뢰의 문제이다. 믿지 못하면, 예술가의 의도를 못 믿을까 봐 일일이 설명한다. 예술은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의 경우로 들면, 관객이 영화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구성하는 형식이 아니라, 감독의 '일방통행'을 구경했다는 느낌만 남게 하는 경우에 그 영화는 재미가 없다. 감독의 강압성만 있고 관객의 자발성이 없어진다. 관객은 없고 감독만 남는 형국이 된다.
통치자도 백성을 믿지 못하면, 자기의 뜻을 강하게 관철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통치자가 강한 이념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은 자신이 지닌 강한 기준 때문이다. 자식과 부모와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불신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는 모두 기준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을 아끼라"(제17장)고 말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라는 말이다. 잔소리는 지켜야 할 것을 부과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삶의 주도권을 리더가 갖는 것이 아니라, 팀원이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발성이 일어나고, 스스로의 존재적 자각이나 자부심이 더 크게 자리한다. 백성도 자식에게도 다 마찬가지이다. 이를 무위(無爲)의 통치 또는 '무불치無不治의 지경'라고 말한다.
이곳 저곳에서 많은 제안들이 들어온다. 잘 선택해야 한다.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 중 제2도인 <서경>이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너무 서두르거나 인위적으로 지나치게 바라지 않고 물 흐르는 대로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충만하게 살 생각이다. 왜 제2도를 <서경>이라 했는지 궁금하였었는데, 어제 알았다. 부제가 '인간의 소명(召命)'이다. 그런데 원래 이름은 <정완(訂頑)>이었다 한다. '바로잡을 정'자에 '완고할 완'자이다. 그러니까 "완고(頑)를 교정(訂)한다"는 뜻이다. '완'은 딱딱하게 경화된 '불인(不仁. 사랑 없음)'을 가리킨다. '불인(사랑 없음)'이란 사욕으로 가득차서, '측은지심'이 나오지 못하는 상태이다. 주자학은 그 장애를 걷어내고 자신의 본성인 사랑을 발견하고 그것과 합치하려는 프로젝트로 규정할 수 있다. 사랑은 분리하는 힘이 아니라, 통합하고 확장되고 성숙되는 힘이다.
인간은 다윈의 생각처럼 영악하게 진화한 침팬지 이상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기체에 본래 설정된 성장의 방향과 목표를 따라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 목표와 방향, 의미가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랑, 질서, 조화 그리고 평화)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길'을 버려 두고 돌보지 않고 있다. 인간이 구현해야 할 우주적 '소명'은 내 어버이를 모시듯 사람을 모시고, 내 자식을 보듬듯 천하의 아이들을 키우고,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이 인간 된 자의 책무임을 역설한다.
길/강연호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을 선이라 한다
최단거리일 때 직선이라 부른다
수학적 정의는 화두나 잠언과 닮아 있다
때로 법열을 느끼게도 한다
길이란 것도 말하자면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이다
최단거리일 때 지름길이라 할 것이다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동안
점들은 언제나 고통으로 갈리고
점들은 마냥 슬픔으로 꺾여 있다
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지금
임의의 한 점 위에서 다른 점을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처음의 제 몸을
가르고 꺾을 때마다 망설였을 점들의 고뇌와 번민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디지털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강연호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텃밭에서/노경아 (0) | 2022.06.24 |
|---|---|
| 풀/이재진 (0) | 2022.06.24 |
| 파리/정호승 (0) | 2022.06.24 |
| 도(道)는어느한쪽으로치우치지않는다. (0) | 2022.06.23 |
| 매화와 매실/최두석 (0) | 2022.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