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6일)

"책을 좋아하지만 사람이 더 좋다. '행복은 소유의 양이 아니라 관계의 질에 있다'는 말을 15년째 마음에 품고 산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엄지혜라는 분이 쓴 <<태도의 말들: 사소한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주문하여 받았다.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인간 관계에 있어 '존중'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그런데, 요즈음 한 드라마가 '추앙'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현대 사회의 관계 기 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추앙과 존중은 다르다. 말이 끼어들었다. "사소한 일상에서든 일에서든 존중이 사라지면 마음이 괴롭다. 사람의 마음은 대단한 일이 벌어져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존중 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아무리 피로한 일도 해낼 수 있다. 그래서 태도가 중요하다."
더 없는 행복이라는 뜻의 지복(至福)을 영어로 'beatitude'라 한다. 이걸 풀면, "Be(존재)+Atitude(태도)"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그것을 마주한 인간의 역량을 측정하는 시험(試驗)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중립적이다. 그것들은 행운이고 동시에 불행이다. 그것들은 희망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건-사고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것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태도(態度)는 곰(熊)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이 건 자신과 태도 문제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태도가 중요한다.
행복의 토대를 만들려면, 우리는 우선 여러 가지 인생의 사건 앞에서 자유롭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의 고통 속에서 살아 남아 이런 말을 했다.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지만 단 한가지는 빼앗아 갈 수 없다. 인간의 마지막 자유,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할 자유이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내의 유일한 쾌락의 원천, 즉 매일 배급되는 빵 한 조각에 죄수들이 보인 태도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 빵 한 조각을 한 번에 다 먹고 큰 만족을 추구했다.
▪ 빵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하루에 여러 번 조금씩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 빵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먹고 마지막 한 조각은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간직해 뒀다.
프랭클은 마지막 태도를 취한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가장 평온했으며 가장 덜 불안해했다고 기록한다. 세계 최고령 피아니스트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111세의 알리스 헤르츠좀머(Alice Ferz-sommer)가 들려주는 인생의 지혜는 현재에서 최선의 것을 구하고 감사하라는 것이었다. (헤럴드 경제, 2103. 2. 22) "나는 여전히 인생이 고마워요." "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처지가 나빠도 우리에겐 삶에 대한 태도를, 심지어 기쁨을 발견하고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존재가 처한 상황 속에서 태도를 결정할 자유,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인문 운동가의 태도는 글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혼자 듣고 흘려 버리긴 아까운 말들을 만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적어야 한다. 엄지혜는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다가, "중요한 것은 진심보다 태도"라는 문장을 만났다고 한다. 이 문장이 빨리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일상의 감각이 합해져 한 사람의 태도를 만"들기 때문에, "언제나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글을 읽자 "진심보다 태도" 더 중요하다는 말이 이해됐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태도(attitude)의 문제이다. 사람은 태도이다.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느냐, 죽음으로 밀려가는 냐는 건 태도의 문제이다.
말의 태도를 우리는 말투에서 느낀다. 따라서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말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말투에는 그 사람 품성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녹아 있어서 나에게 잘해도 말투가 별로이면 멀리한다. 제일 싫어하는 게 빈정거리는 말투이다. 어떤 대상이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거나 자기 의견을 덤덤히 말하면 되는데, 꼭 이죽거리는 사람이 있다. 조롱하고 말 장난하는 것을 재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멀리하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제목은 '말의 태도'가 아니라, "태도의 말"이다. 말의 태도와 태도의 말이 주는 어감에는 약간의 뉘앙스가 있다. 시작과 끝이냐, 끝과 시작이 냐의 차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추억할 때 떠 오르는 것은 그의 실력이 아니라 태도의 말, 그에 대한 태도의 느낌이다. 우리는 날마다 본성 차원에서 타자 또는 타인들과 접촉하며 산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그 사람의 본성을 본다. 사람들은 내가 한 말과 내가 한 행동을 잊지만,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 가는 잊지 않는다. 이게 태도에서 나온다고 보며, 우리는 이를 감성(感性)이라 한다. 마케팅에서는 감성 자극이라 한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구체적으로 말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서로의 진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말하는 태도로 읽는 경우가 많고, 그 이미지, 그 느낌이 오래 기억된다.
그녀가 100개의 문장을 뽑았다. 하나 같이 긴 여운이 남는 문장들이다. <인문 일기>에서 공유하고 싶다.
① <<책 먹는 법>>의 저자 김이경 작가가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존경할 필요는 없다니까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에게는 존경, 존중, 요즈음 핫한 추앙, 환대 등의 단어들이 겹쳐진다. <<탈무드>> 중 "선조들의 어록" 제4장 1절에 나오는 랍비 벤조마는 "누가 존경을 받을 만한 가? 그는 모든 인간을 존경하는 사람"이라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눈을 뜨면, 공적으로 인정과 갈채를 받고 훈장을 수여한 사람이 존경 받을 만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자신이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을, 그 사람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모처럼, 혹은 신처럼 존경하는 사람이 존경 받을 만하다. 남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존경을 받는다. 존경이란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이 사전적 정의이다. 영어로 '리스펙(respect)'이다.
존경과 존중은 다르다. 위에서 말한 거처럼, 존경은 상대의 인격과 성품에 감동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그를 공경하는 마음이지만, 존중은 상대의 인격이나 성품에 관계 없이 그를 공손히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존경은 대상의 수준이지만, 존중은 내 성숙함의 수준이다. 대상의 수준보다 대상의 존재 자체를 높이고 귀하게 대하려는 존중은 나의 성숙에서 나오는 거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에서 추앙의 사전적 의미는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이다. 나는 이 말이 불편하다. 상황에 맞는 단어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설명 할 수는 없다. 너무 언어들이 날섰다. 이런 대사도 있다. "나는 갈망하다가 뒈질 거야." "이상하게 마주 보고 있는 게 불편하더라고. 사람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뭔가 전투적인 느낌이야."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난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존경이든, 추앙이든, 환대이든, 친절이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늘 힘들다. 그냥 상대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나 내 <인문 일기>에 "적을 만들지 않는 3가지 원칙"이라는 것을 적어 둔 적이 있다.
1. 데일 카네기에 의하면, "꿀을 얻으려면 벌집을 바로 차지 마라" 했다. 누군가 날 싫어한다면 그건 막을 수 없다. 어차피 모두의 마음에 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나 친해지려 애쓰지 마라. 날 싫어하는 이와 내가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서로 안 보는 것뿐이다. 그런 관계는 빨리 포기할수록 좋다. 그렇게 아낀 시간을 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써라. 그러니 모두에게 잘 보이려 하지 마라.
2. 한 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이 어렵다. 그러니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실수 한 번에 모든 신뢰가 무너질 수 있는 게 인간 관계이다.
3. 절대 남을 비난하지 마라. 종종 건설적인 비판이라며 함부로 남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은데 위험한 행동이다. 그게 옳은 일이라도 어차피 상대는 수용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만 잘 지켜도 인간 관계로 인한 문제가 거의 생기기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만든 김용화 감독이 한 말 중에 오래 기억하는 것이 있다. "나쁜 사람은 없고, 나쁜 상황만 있다." 어린 시절에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죄를 미워해 야지,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는 말과 겹쳐진다. 고우 스님의 <<육조단경>>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없다. 사람을 차별하고 미워하면 안 된다." 파도는 무조건 나쁘고, 잔잔한 물은 좋다,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분노하는가? 드라마는 말이 없다. 왜 지금의 사회 현실에 분노하는가?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1)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 기득권 세력이 너무 ‘갑'질 하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려 한다.
2) 권력이 부도덕하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권력을 계속 잡기 위해 잘못된 선거 시스템을 이용해 노인들하고 만 상대한다.
3) 사법정의가 무너졌다. 사법이 권력을 지향한다.
4) 빈부격차가 자꾸 벌어진다.
5)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연대하려 하지 않고, 공동체 내에서 창피함을 모른다.
대안은 없을까?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 본다.
1) 분노를 조절하려면 취미 생활을 통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한다.
2) 공동체와 친구들과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3) 경제적 논리를 벗어난 다른 삶의 논리를 찾는다.
오늘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사람들을 기리는 날인 현충일(顯忠日)이다. 난 한문으로 '忠'자를 좋아한다. 한 마음을 먹는 일이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 가운데’를 뜻한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에서 헤매지 않고 마음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정성을 다할 수 있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마음을 먹으면, '환患', 걱정이 된다. 오늘 아침 시는 현충일에 바치는 시이다. 그리고 호국 영령들에게 하얀 장미를 바친다.
평화나누기/박노해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충이라는 것은 타인, 혹은 외부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 선언하는 인간학적 다짐이다.
오늘 다시 한 번에 '충(忠)''에 대한 오해를 풀어본다. '충'에 얽힌 이야기는 <<논어>> "이인(里仁)"편 제15장에 나온다. -子曰(자왈): 「參乎! 吾道 一以貫之.(삼호! 오도 일이관지.)」曾子曰(증자왈): 「唯(유).」 子出(자출). 門人問曰(문인문왈): 「何謂也(하위야)」曾子曰(증자왈): 「夫子之道, 忠恕而已矣(부자지도, 충서이이의).」 공자가 말하길,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고 하니 증자가 말하길, “네!” 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이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 하자,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충(忠)이란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 가운데’를 뜻한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에서 헤매지 않고 마음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정성을 다할 수 있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서(恕)는 같음을 뜻하는 여(如)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나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과 같다는, 혹은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마음의 중심을 잡을 때(忠), 타인의 마음 또한 충(忠)하다고 믿을 수 있다. 충(忠)하지 못하면 서(恕)하지 못한다. 마음이 가장자리에 머물러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마음 또한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각박하고 옹졸해 진다. 그래 진정한 용서는 인내와 억누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나처럼 마음의 가운데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 태도에서 나온다.
서(恕)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공감(sympathy)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충서'란 곧 ‘정성과 공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충을 서(恕)와 짝을 지어 말하지 않고, 성(誠)과 짝을 지어 '충성(忠誠, loyalty)'이라고 말한다. '충성'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뜻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다. 충성에서 성(誠)이란 본래 충(忠)의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충성이 곧 충이다. 원래 충이라는 것은 타인, 혹은 외부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 선언하는 인간학적 다짐이다. 충은 오히려 국가적 권위나 외부의 명령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확고한 믿음을 강조한다. 국가가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갈 때 과감히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충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충성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충'이란 대상이 필요 없이 자기 홀로 실천하는 것이다. ‘충성한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이다. 스스로 마음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국가에 대한 헌신이 가능하고, 타인에 대한 정성도 가능한 것이다. 충의 결과를 충 자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고 타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처럼 대해야 한다는 실천 강령을 의미했던 '충서' 개념은 이후 주희(朱熹)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강화된다. 주희에 의하면, '충'은 단순히 실천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까지 보장받는 인간의 본성(性)이 된다. 증자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라고 윤리적 측면에서 '충'을 강조했다면, 주희는 ‘모든 인간이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은 하늘에 의해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충을 규정함으로써 존재론적 측면에서 강조했다.
충(忠)하지 못한 사람을 윤리적으로 지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희는 그런 사람을 존재론적 층위에서 우주의 법칙에 벗어난 사람으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배척해 버린다. 윤리적 비난에는 인간적 끈끈함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배척에는 그러한 여지가 원천 봉쇄된다. 단죄는 엄하되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힘은 미약하다. 주희는 '충서'를 형이상학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각박하게 해석하여 오히려 충서(忠恕)스럽지 못한 결과를 빚고 있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우리 동네에 있는 '현충원(顯忠園)'이다.
최근에는 '충서'를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일(하나)로 이해하여 일원론적 해석을 하는 이가 더 많다. '충서'를 하나로 보는 것이 굳이 도치법을 써서, '일(一)'을 강조한 본래의 취지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충서'를 공자의 '도(道)'로 설명한 증자의 설명에도 들어 맞는다. '충서'란 '서' 개념에 충실한 것, 즉 '서'로 일이관지 하는 것을 말한다. '서'에 충실한 것이 공자의 '도'란 말이다. 여기서 충은 '하나의 개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충실을 기한다'는 뜻이지 '서'와 구분되는 또 다른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논어>의 "위령공"편 제23장 자공이 물었다. "子貢問曰(자공문왈) 有一言可以從身行之者乎(유일언가이종신행지자호) 子曰(자왈) 其恕乎(기서호) 己所不欲(기소불욕) 勿施於人(물시어인). "한마디 말로 평생토록 지키고 행할 수 있는 말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바로 서(恕)일 것이다.' '서(恕)'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자 철학의 '일이관지'하는 핵심 원리는 '서'이다. 위에서 이미 말했던 것 처럼, '충', '속마음을 다하는 것(中心), '서'를 '같은 마음(如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이란 '공감, 교감'을 뜻한다. 공자는 '서'의 뜻을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서양에서 말하는 '황금률(Golden Rule)'과 같은 의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공자 철학의 도를 '인(仁)'으로 본다. 여기서 인은 '사람 사랑'이다. 그러면 '서'는 '인'의 실천을 만드는 근거가 된다. '서'가 공자의 '일이관지'하는 개념이라면, '인'은 실천원리이다. '서'와 '인'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서가 공감적 감정 작용으로써 아직 '인'이 아니며, 그냥 감정으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수신(修身)'을 통해 '인'의 덕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서'에 항상 '인'이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고, '서'의 감정을 갈고 닦아 습관화한 덕성이 곧 '인'이다. 반면 '인'에는 '서'가 항상 따라다닌다. '인'을 행할 때는 '서'의 감정작용이 받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인'은 맹자에게 가면 더 적극적이 된다. 맹자의 四端之心(사단지심) 중에 하나인 '인'은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보다 더 힘들어 하는 것을 넘어,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보다 더 즐거워하는 공감능력과 그 공감능력이 함양되는 정도에 따라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천하를 포괄할 수도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적극적인 형태의 '거룩한 인', 즉 숭고한 도덕원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행복/김재진 (0) | 2022.06.07 |
|---|---|
| 망초꽃/곽대근 (0) | 2022.06.07 |
| 화살나무/손택수 (0) | 2022.06.06 |
| 6월의 간절한 기도/권정아 (0) | 2022.06.06 |
| 보리밭/작사, 박화목, 작곡, 윤용하) (0) | 2022.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