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에 철학자 강신주가 <법보신문>에 연재한 <무문관과 철학>을 꼼꼼하게 읽었군요.
기억하고 싶은 내용을 다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함께 공유해요.
1. ‘마음의 활동성’이 중요하다.
사찰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혜능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이 후설의 지향성 것입을 멋지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불교에서는 ‘마음의 활동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지향하는 활동, 혹은 쏠림 그자체가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활발발(活潑發)’한 마음의 활동성을 강조합니다. ‘살아있는’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살아서 팔딱거리며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라는 말을 할 때처럼,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 지나치면 그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활동성, 즉 활발한 마음의 역동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굳어 있는 마음은 안 됩니다. 일단 무엇인가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려면,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쏠려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역동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깨달음을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고 사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는 것입니다. 등산지도로 설악산을 눈으로 더듬어 가는 것과 몸소 차가운 눈보라를 맞으며 설악산을 한발 한발 걷는 것 사이의 차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늘 활발발하게 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해가 떴다고 해서 바로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이 바로 녹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해가 뜨고 내일도 해가 뜨고, 이러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 사인엔가 겨울 내내 쌓였던 눈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집니다. 이렇듯, 하루하루 자신의 일상을 마음의 활동성을 가지고 살다보면,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겠지요.
후설의 현상학에 따르면, 세계는 마음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계는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는 지향성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그 말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에 쏠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향성이 없이는 객관과 세계는 우리에 대해 현존하지 않는다.” 후설은 객관과 세계라는 말 대신 노에마(noema)란 말을 사용합니다.
노에마란 우리의 마음, 혹은 정신인 nous가 지향하고 있는 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설이 그리스어 누스'nous(정신, 이성)' 와 '노에인noein(사유하다, 지각하다, 직관하다)'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술어입니다. 노에시스를 직역하면 '의식작용'뿐입되지요.
한편, 후설은, 질료에 노에시스가 작용해서 생겨난 '의미'를 노에마(noema)라고 이라 불넜습니다. 노에마는 재료와도 다르고 작용과도 다르지요. 그것은 의식되고 있는 의미적인 내용 자체인 것입니다. 질료는 어디까지나 대상측에 속하는 데 반해, 노에마는 의미를 통합하는 노에시스의 작용이 진행될 때 의식영역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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