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25일)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시간이 흐를 동안 애쓴 내가 해결해 주는 거다. 가만히 시간을 흘려 보내기만 한다면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야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시간도 필요하고, 동시에 애를 쓰는 일도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양쪽 다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전관(全觀)적인 시선을 갖는 거다. 노자 철학에 따라, 무심하게 순환하는 역사(시간=도)의 장 위에서 오늘 나의 삶을 위하여 무언 가를 창조하는 한 걸음을 내 딛는 거다. 역사 그 자체에 의미부여를 하는 어리석은 짓을 때려 치고, 역사의 계기 계기에 아름다운 무위(無爲)의 실천,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불선이 하나되는 전관적인 삶의 건강을 실천하는 거다. 오늘 아침 사진의 "갈대"처럼. "곡(曲, 휘어짐)"과 "전(全, 온전함)", "왕(枉, 굽어짐)"과 "직(直, 곧아짐)" 등이 양립 불가능한 반대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불가결의 상관 개념으로 보는 거다. 도올은 전체를 보는 것이라 하여 "전관"이라는 표현을 했다.
나도 이 말이 좋다. "전관의 지혜를 가지는 자는 대대(對待) 관계의 양면을 포월(包越)한다"(김용옥)는 거다. "대립하는 것들은 서로 의지하여 자신의 존립을 도모한다. 유가 있기 때문에 무가 있으며, 무가 있기 때문에 유가 있다. 그래서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이라고 말했다. 즉 대립자들은 대립하는 가치들을 포섭하는 것이다. 유는 무를 포섭하고, 무는 유를 포섭한다. 어려움은 쉬움의 포함하며, 쉬움은 어려움을 포함한다. 그런데 결국 이 대립자들은 서로 대립되는 상대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쉬움이 어려움이 될 수가 있고, 어려움이 쉬움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대립되는 양면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통일하는 것이 포월(包越, 품어 안고 넘는다)의 지혜"(김용옥)라는 거다. 그 길이 전관(全觀)의 인간이 되는 거다.
오랜만에 장자를 만난다. 장자는 "이상적인 인간(聖人, 성인)이 도달한 세 가지 경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다. 이는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모든 분별이 사라지고,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마저 없어져 버리고, 말이나 어떤 수단으로 표현할 도리가 없는 궁극의 경지, 논리나 개념이나 관념이 들어갈 틈이 없는 절대 초월의 경지, 이른바 '없음(non-being)'의 경지이다.
(2)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다. 사물 자체는 존재하나 아직도 거기에 경계가 생기지 않은 경지, 분화하지 않아서 '하나'인 상태, 이른바 '있음 자체(有, Being-self)'인 경지이다.
(3)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다. 사물이 개체(個體)로 분화해서 각각 구분이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경지이다.
옛사람들은 그런 경지에서 살았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원숭이들처럼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아집에 사로잡혀, 밤낮 옳고 그름만 따져 도가 허물어지고 애착이 생겨나 아옹다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그 근원적인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진정으로 자유스럽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절대무(絶對無)'의 상태에서 어떻게 사물이 생겨, 거기에 다시 구별이 생기고, 시비가 생기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은 원초의 정적(靜寂)에 음률을 더하는 것이어서 본래의 하나됨이 허물어져 기호(記號)와 경계(境界)가 생기고 대립과 분별이 생겼다는 것이다.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원초의 정적, 원초의 하나됨으로 회복되는 것이고 이룸이 허물어짐 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나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됩니다(樸散則爲器, 박산측위기)"하는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본래 비분화된 도가 분화될 때, 세상의 여러가지 구체적 사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원초의 세계가 분화의 세계로 바뀔 때, 거기에 대립하고 얽히는 세계, '소외'의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르지 않는다(不割)"고 하고, 또 "멈출 줄 안다(知止)"고 하였다. 멈출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분법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세계는 대립하는 것들을 함께 껴안을 때 '갓난 아기'의 상태, 무극의 상태, 통나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도덕경>> 제28장과 제32장), 장자는 이렇게 원초적인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사람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고, 이것저것을 분별하는 시비를 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적인 것(庸)'에 안주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밝음(明)'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를 "이우제용(而寓諸庸)"이라 했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지혜, 명(明)이라는 것이다.
난 <<장자>>에 나오는 "而寓諸庸(이우제용)"란 말을 좋아한다.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에 맡긴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庸)에 머문다." 여기서 '용'은 '보편적인 것' 즉 '불변의 자연'을 말한다. '우'는 '머무르다'는 말이다. '제용'은 '보편'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지혜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라는 거다.
섭리라는 말을 생각하며, 산책을 하다가 오늘 아침 사진을 찍게 된 것이다. 작년 갈대가 올해 무섭게 크고 있는 새 갈대에게 자리를 내 주고 있는 거다. '해마다 성장하는 갈대는 같지만, 갈대를 바라보는 나는 작년과 다르다. 여기서 '다르다'는 내가 우선 늙어 간다는 거다. 몸의 컨디션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니 서글퍼진다. 그 서글픈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갈대 숲은 왜 작년이나 올해나 그 빛깔과 이파리가 똑같다는 말인가' 하는 탄식이 나오게 된다. 새로운 갈대의 아름다움과 육신의 늙어감이 대비된다. 이 대비에서 인간은 종교적 순응의 마음을 터득하는 것 같다. 순응 해야지 어쩌겠는가. 춘하추동의 순환과 생로병사의 변화를 어떻게 거역한단 말인가. 운명에 거역하면 질질 끌려가지만 순응하면 업혀간다는 말도 있다. 기왕 갈 바에는 질질 끌려가는 것보다는 업혀서 가는 게 좋다. 순응과 받아들임. 이것이 나이 들어 가는 미덕이고 사람이 익어간다는 징표라고 생각된다. 나는 주름살이 늘어 가는데, 갈대 너는 왜 그렇게 해마다 싱싱한 것이냐 하는 물음도 결국 인간의 욕심이다. 대자연의 섭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인간의 주관적 관점으로 철리(哲理)를 비틀어 보는 셈이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오늘은 강요 받은 일정이 하나도 없다. 오후에 비가 온다니까, 오전에 선물 받은 고구마도 심고, 고추도 심을 예정이다. 협동조합 기본법 제정 10주년을 맞아 그간 성과를 상징하는 협동조합을 발굴하고, 협동조합의 공익적 역할과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우수 사례를 확산하기 위한 “2022년 베스트 협동조합 어워드”에 공모를 했는데, 오늘이 1차 서류 심사 발표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시를 다시 공유하고, 섭리라는 사유를 더 이어간다. 그건 블로그에 업로드 한다.
별/이동순
새벽녘
마당에 오줌 누러 나갔더니
개가 흙바닥에 엎드려 꼬리만 흔듭니다
비라도 한 줄기 지나갔는지
개밥그릇엔 물이 조금 고여 있습니다
그 고인 물 위에
초롱초롱한 별 하나가 비칩니다
하늘을 보니
나처럼 새벽잠 깬 별 하나가
빈 개밥그릇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섭리(攝理)'라는 말을 나는 늘 어려워 했다. 프랑스어로는 '프로비덩스(providence)'라 한다. 사전에서는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라 정의하며,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으로도 쓰인다. 섭리(=신)은 언제나 한 명을 선택하여 자신의 뜻을 전하고 세상을 바꾼다. 물론 신은 누구나 부른다. 그러나 미세한 소리로 부르는 부름을 듣는 자는 많지 않다. '섭리'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부름을 알아듣는 자이다. 보통 우리는 이기심에 귀가 멀어, 쾌락과 파멸의 장단에 춤을 추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말을 신봉해왔다. 자신이 생각과 발견한 이성으로 인생과 우주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착각했다. 우주, 자연, 그리고 인생을, 생각지도 못한 것들, 상상하지도 못해,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섭리라는 말이 어려운 것 같다. 자연의 이치(理致)를 귀담아 들어야 알아채는 것 같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만 가지고 하느님이 두는 바둑의 포석을 알기 어렵다. 신의 섭리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래 인간들은 어떻게 해 서든지 신의 섭리를 슬쩍 커닝이라도 하려고 신탁과 점술을필요로 한다. 아무리 미신이라고 두들겨 패도 점술이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는 이유이다.
배철현 교수는 자신의 <묵상>에서 섭리를 성서에 나오는 '욥 이야기"로 설명한 적이 있다. 성서에 등장한 욥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 권력, 그리고 명성을 쥔 ‘알파 인간’이었다. 심지어 그는 주위사람들을 챙겨주고 배려하는 겸손한 인간이었다. 그를 묘사하는 획기적인 문구가 있다. 그는 ‘타인에게 정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3인칭의 눈으로 봐도 완벽한 인간’이었다. 신은 그런 욥을 사탄을 동원하여 시험하기로 결정했다. 동방최고의 부자였던 욥은 하루아침에 자연재해로 재산을 잃어버린다. 그 뿐만 아니라 10명의 자식도 사고로 죽는다. 심지어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은 악성 종기로 덮여 그 가려움을 달래기 위해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불쌍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불행의 시작일 수 있고 불행은 행복을 준비하는 과정을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는 척하면서,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신앙을 나무랐다. 그들은 욥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자초했다는 거다. 신은 인간이 잘하면 복을 주고, 잘못하는 벌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신은 인간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그들과 욥은 옥신각신하여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지만 역부족이다. 이 때 신이 등장한다. 삶은 우여곡절이다. 삶을 가치가 있게 만들기 위한 유일한 조치가 잔인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작스런 죽음이나, 혹은 자신이 몹쓸 병에 걸린 경우,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내가 그 시련을 대하는 태도다. 우리가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는다면, 신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깊이’ 응시하고 그런 시련의 이유를 찾으려는 사람에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침묵의 소리’로 말을 건다. 즉 질문을 한다.
신이 욥에게 했던 그 질문은 "내가 세상에 기초를 놓았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인간에게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질문(質問)이다. 질문에 답이 없을 수도 있다. 해답을 찾아가는 더 깊은 질문이 남을 뿐이다. 질문은 자신을 삶을 더 높고 넓고 깊은 경지에서 바라보라는 명령이다. 이 질문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품은 사람은, 이미 그 질문이 해답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문제는 질문을 경청하기 위해서는 머리에 달린 두 귀가 아니라 마음의 귀를 정성스럽게 기울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생이란 질문의 이치를 조금 파악할 수 있다. 한자 섭리(攝理)가 그런 뜻이다. 동양의 맹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한다.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운과 역량을 키워 주기 위함이라는 거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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