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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늘/박준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요즈음 우리들의 일상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 '산만함'이다.

나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한 주제를 깊이 파야 하는가, 아니면 넓게 파야 하는가 문제이다. 그러나 일상이 자주 이런 식이다. 무엇인가 검색을 하기 위해, 네이버를 켰다가 여기저기 궁금한 링크들을 눌러 보느라 막상 애초에 무엇을 검색하러 들어왔는지 까맣게 잊는 일은 이제 하나도 새롭지 않다. 그리고 내 취향에 맞추어 동영상과 뉴스와 음악과 신상품을 추천해 주는 신비한 알고리즘을 따라 넓게 쫓아다니다가 시간을 다 보내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을 '나는 깊이 파기 위해서 넓게 파기 시작했다'라는 말로 위로한다.

우리는 매번 길을 잃지만, '이것이 무의미한 방황만은 아닐 것'이라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산만한 마우스 클릭으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넓게 땅을 파 내려가고 있는 것이기에 언젠가는 세상과 인생의 비밀을 깊게 파헤치는 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희망을 갖는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산만한 공부가 설마 그냥 흩어지기만 하겠는가?' '이런 계통 없는 검색과 노동과 만남이 설마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겠는가?' '오늘의 넓이는 내일의 깊이를 낳으리라.'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깊게 파기 위해서 넓게 파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은 하나의 오래된 진리를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넓이는 깊이를 지향한다. 넓이가 필요한 것은 깊이 때문이다. 넓이는 자신을 이겨냄으로서 결국 깊이에 도달할 것이다. 깊이는 넓이로 나아갔다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즐거움을 나누려면, 여러 가지보다 여러 번, 오래 같이 있어야 하고 깊게 만나야 한다. 기원후 1세기 로마 시대의 문인 플리니우스는 이를 “여러 가지보다는 여러 번!(non multa, sed multum)”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여전히 넓이가 아니라 깊이다. 살다 보니까, 여러 가지보다, 깊이 있게 여러 번 만나 얻은 즐거운 경험이 더 중요하다. 그래 아침 내 글보다 자꾸 깊어지며 길어진다. 사람들은 '화장실 교훈' 같은 짧고 진부한 문장들에 그냥 시간을 소비 당하며 즐거워 한다. 나도 그런 면이 있지만 반항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그것들은 "그늘"이다. 사진은 농장 다녀오는 길에 찍은 것이다. "그늘"을 찍고 싶었다.

그늘/박준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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