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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2)

198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2일)

 

지난 4월 29일 이후, 두 번째로 앵커스 플레처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한다. 나는 문학이 온갖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 건강을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을 보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 방식이 무언가를 정리하고 싶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치유과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라 했다.

카타르시스는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정화한다는 뜻의 의학용어이다. 관객은 비극공연이 마치면, 그 주인공으로부터 다시 빠져나와 자신으로 돌아간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월경月經’과 관련된 의학용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생명 탄생과 연관된 원초적인 단어를 정신 건강적이며 문학적인 은유로 전환하였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배설해야 할 감정의 찌꺼기를 버리는 정신적인 ‘목욕 재계’가 카타르시스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배설(排泄)'은 하루라는 시간을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을 만들기 위해, 두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날라, 지금 여기 있는 내 자신을 찍어 보는 연습이다. ‘밀칠 배(排)'자는 새의 날개가 뒤틀려져 온전히 비행할 수 없는 상태(非)를 감지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손(手)으로 제거하려는 용기다. ‘샐 설(泄)'은, 자신도 모르게 쌓인, 반드시 인식하고 버려야할 구태의연함과 진부함을 물로 완벽하게 씻어내려는 노력이다. 

몸의 대사 작용 후에 남은 적폐는 배출한다고 한다. 배출과 배설은 다르다. 대사는 신진대사(新陳代謝)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신진대사는 ‘신진(新陳)’과 ‘대사(代謝)’를 합했는데, ‘신진’은 에너지공급, 즉 몸에 좋은 음식은 잘 공급하고 해로운 것은 금하는 것이며, ‘대사’는 해독, 즉 몸에 불필요해진 모든 것을 잘 분해해서 몸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동양의학에서는 ‘배설(排泄)’이라고 했다. 에너지가 충분하고 해독이 잘 되면 몸이 편안하니 당연히 밤에도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다.

말이 다른 데로 빠졌다. 다시 돌아온다. 앵커스 플래처는  그리스 비극에서 의학 기능을  찾아내었다. 그런 측면에서 문학은 우리들의 정신적인 약인 거다. 그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장에 갔을 때, 그리스 비극이 기분 좋게 하는 게 아니라, 덜 나쁘게 느끼도록 한다는 점을 알아냈다는 거다. 좋은 기분(feeling good)'과 덜 나쁜 기분(feeling less bad)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다.
- '좋은 기분'은 경이와 희망 같은 긍정적 경험으로 뇌를 채울 때 나온다. 현대의 정신 의학 용어로 말하면, 좋은 기분은 '고양된 정신 건강'으로 우리 사람이 최고조에 도달하여 대단히 행복한 상태로 이어진다.
- '덜 나쁜 기분'은 슬픔과 불안 같은 부정적 경험을 뇌에서 비울 때 나온다. 덜 나쁜 기분은 '개선된' 정신 건강, 즉 정신적 웰빙과 평범한 일상을 위한 심리적 토대가 된다.

문학은 온갖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 건강을 개선할 수 있다는 거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는 치유과정을 강조했다. 카라르시스라는 말은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정화한다는 의학 용어이다. 그럼 무엇을 정화한다는 말인가? 우리들의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다 나쁜 건 아니라 한다. 실은 건강에 매우 유익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위험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릴 때는 뇌에 해로운 두려움이 쌓일 수 있다. 이를 현대 의학에서는 '외상 후 두려움'이라 한다. 만성 무력감, 고립감(혼자라는 감점), 과잉각성(잠을 못 자게 한다)으로 삶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그리고 흔히 불안장애와 분노와 우울증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외상성 두려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치료법이 효과를 낸다고 한다. 하나는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거다. 이를 '자전적 검토(autobiographical review)'라 한다. 안전한 환경에서 트라우마 경험을 떠올리면, 기억의 '섬광' 강도가 점차 약해진다는 거다. 트라우마 신경피질의 장기 저장 공간에 생생한 경험의 일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자전적 검토를 통해 그 기억을 덜 아프고 덜 거슬리게 유도하여, 트라우마를 의식의 뒤편으로 덜어내고 무력감과 고립감과 과잉각성 증상을 줄일 수 있다는 거다. 두 번째는 트라우마를 검토하는 동안 눈을 좌우로 움직이면 도움이 된다는 거다. 눈을 좌우로 움직이면 두려움 감소와 관련된 회로인 '상구-중앙 내측 시상핵'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이러한 치료법을 '안구 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이라 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 그 나름의 자전적 검토와 EMDR을 이미 포함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리스 비극은 자살과 살인, 폭행 등을 합창 구호의 형태로 무대에 올려 우리에게 과거의 트라우마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 구호를 관객은 듣기만 한 게 아니라, 직접 보기도 했다. 코러스(Koros)라는 배우들이 이 구호를 연호하며 몸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코러스는 요즘 말로 하면, '노래'를 뜻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춤'과 동의어였다. 그리스 비극의 경우, 춤을 추는 공간이 굉장히 넓었다 한다. 직경이 20미터 넘는 타원형의 야외극장 바닥이 그들의 무대였다. 우리는 이 구역을 오케스트라(orchestra)라 부른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리스 비극은 외상 후 두려움에 대한 두 가지 치료법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첫 번째는 물리적으로 안전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관객에게 외상 후 기억을 검토하도록 자극했고, 연극의 코러스는 역동적 공연으로 관객의 시선을 좌우로 움직이게 했다. 실제로 최근의 공연에 이러한 것을 적용하였더니, 퇴역군인들이 고립감과 과잉각성, 외상 후 두려움의 여러 증상이 완화되었다는 보고들이 나왔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묘사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는 치유 효과를 개선하기 위한 혁신을 이어갔다는 거다. 그 문제는 내일로 미룬다. 어제는 코로나-19 이후 거의 2년 만에 청안 동창과 대전 동창의 탁구 시합을 핑계로 예산 신례원에서 만났다. 예당호의 특별 음식인 어죽을 먹고, 저녁에는 친구가 준비한 옻순을 실컷 먹고 왔다. 감사할 일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우리는 탁구시합을 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관심 없다. 함께 땀을 흘리고, 저녁에 술 마시며 맛있는 저녁을 함께 하고 헤어진다. 한 번은 대전에서, 한 번은 천안에서 모인다. 어제는 천안 원정 경기였다.

두릅, 이걸 한문으로 하면 '목두채'라 한다. '나무의 머리 채소'라는 뜻이다. 그리고 가시가 있는 엄나무순, 향이 진한 가죽나무순, 오가피순 그리고 옻순을 어른들은 봄의 5대순의 말한다. 이 어린 순들을 먹을 때 미안한 마음은 든다. 그러나 순을 따주는 것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걸 방지 하기 위해 필요하다. 두릅이나 오가피 순은 향이 있지만, 옻순은 식감이 좋고 고급지다. 그래 사람들은 옻순을 봄나물의 제왕이라 한다.


오월이 돌아오면/신석정 
 
오월이 돌아오면 
내게서는 제법 식물 내음새가 난다 

그대로 흙에다 내버리면 
푸른 싹이 사지에서 금시 돋을 법도 하구나 

오월이 돌아오면 
제발 식물성으로 변질을 하여라 

아무리 그늘이 음산하여도 
모가지서부터 푸른 싹은 밝은 방향으로 햇볕을 찾으리라 

오월이 돌아오면 
혈맥은 그대로 푸른 엽맥(葉脈)이 되어라 

심장에는 흥건한 엽록소(葉綠素)를 지니고 
하늘을 우러러 한 그루 푸른 나무로 하고 살자 


참고로 언젠가 적어 두었던 아리스토켈레스의 <<시학>> 이야기를 좀 이어간다. 배철현 교수의 <묵상>에서 얻은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 공연의 궁극적인 기능과 목적을 관객들의 ‘카타르시스’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나 기능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러나 배철현 교수는  카타르시스를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설명 가능하다고 했다. 첫째, ‘카타르시스’는 도덕적이거나 지적인 깨달음이다. 그리스 비극을 보는 관객이 주인공의 치명적인 약점을 파악하여 자신의 삶을 위한 길잡이로 여기는 마음이다. 둘째, ‘카타르시스’는 감정적인 정화이거나 치료다. 비극 주인공에게 운명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비극 관객이 비극공연에 몰입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무아(無我)를 경험한다. 그는 주인공이 겪는 공포를 함께 느끼고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느껴 함께 눈물을 흘린다. 어쨌든 관객은 비극공연이 마치면, 그 주인공으로부터 다시 빠져나와 자신으로 돌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극은 연습에 대한 재현이다. 그것은 단호하고, 목적과 수단이 하나가 되는 그것 자체이고, 압도적이다.” 인생이란 무대에 올라온 나라는 존재는 연습(練習)이다. 연습을 시도하는 배우는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어야 한다. ‘신하’ 역할을 맡았는데, ‘왕’ 역할을 탐하여 연기한다던지, 혹은 ‘왕’ 배역을 맡은 자가 ‘신하’처럼 연기한다면, 그는 관객과 자신에게 초라해 보이고 안쓰럽다. 신명이 날 리가 없다. 자신이 해야 할 배역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되기 위해 연습한다. 

연습은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그것을 온몸과 정신에 익히는 작업이다. 연습은 저 밤하늘의 별을 따서 자신의 가슴에 심어 놓는 작업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별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별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오래전에 뇌에 장착한 ‘거울 신경계(mirror neuron)'를 통해, 내가 그것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하루란 그것 자체가 되기 위한 연습이다. 지금-여기는 그것을 재현하기 위한 마당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mimesis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플라톤은 이 단어를 폄하하였다. 그는 철학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겁한 방법을 사용한다. 철학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예술이나 문학이 추구하는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소위 철학을 ‘부정적으로 정의’하였다. 후에 그리스도교가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단’이란 개념을 사용한 전략과 같다. 여기서 그것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그림, 음악, 혹은 글로 표현하려는 시도다. 그는 ‘미메시스’를 ‘흉내’imitation란 의미로 사용하였다. 아름다운 꽃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시로 표현하는 예술가나 시인은, 그것 자체를 표현할 수 없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다. 그는 ‘미메시스’를 흉내가 아닌 재현(再現, representation)으로 설명한다. 재현이란, 지금 당장, 여기서 나의 연습을 통해, 완벽한 형태로, 심지어는 원형보다 더 감동적으로 드러나는 현현(顯現)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