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28일)

어제 못다한, 노자의 <<도덕경>> 제24장 이야기를 오늘 아침에 조금 더 한다. "여식췌행(餘食贅行, 음식 찌까기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삶 이야기를 하려 한다.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으로 시작되는 이 장은 과유불급을 도가식으로 풀어낸 장이다. 멀리 보려는 욕심이 지나쳐 까치발로 서면 신체의 중심이 무너져 안정된 자세로 서 있을 수 없다. 빨리 가려는 욕심이 지나쳐 보폭을 지나치게 크게 하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봄을 앞당기려고 겨울을 짧게 하지도 않고, 앞서 가는 물을 추월하려고 덜미를 잡지도 않는다. 자연처럼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스스로를 드러낸다 거나, 스스로 으스대고 자랑하는 행동도 자연스럽지 않다. 노자는 이러한 것을 "여식췌행(餘食贅行)", 즉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과 같다고 말한다. 도에는 "여식췌행"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 미니멀리즘이 도를 닮은 행동이다. 원문은 이거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는 도의 모습은 부드럽고 조화롭고 자연스러움이다. 그러한 것에 거스르는 것은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까치발로 서는 것은 서 있기에 불안정하고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 또한 급하고 조급함을 일으키니 도에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의견만 고집하고 옳다고 여기는 자는 세상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여 도의 모습을 거부하려는 자이다. 자기 자랑을 일삼고 자기 잘남 멋에 사는 사람 또한 도를 따르지 않는 자이다.
실제로 까치발로 서거나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은 사람들 눈에 쉽게 띈다. 눈에 쉽게 띄지만 불안정하다. 사람이 보여주기 식의 일을 하여 다른 이의 관심을 끄는 일을 하려다 보면 자기 의견에만 집중하고 바른 말을 하는 남에게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어쩌다 일을 해서 성공했다고 치자, 그러면 자기 자랑을 일삼는다. 그런데 이런 것은 결국 모두 남은 음식 찌꺼기처럼 처치 곤란한 것이고, 몸에 난 혹처럼 군더더기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도를 터득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좀 더 높이 서겠다고 까치발로 서는 일을 하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려 하거나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을 하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기의 견해만을 내세우지 않거나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공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우쭐대며 자만하다가 자신의 자리를 차버리지 않는다.
▪ 도를 터득한 사람은 세상과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자연스러운 관계를 추구한다.
<<장자>> 제4편 "인간세" 2절에서도 이와 비스한 이야기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
夫道不欲雜(부도불욕잡) 雜則多(잡즉다) 무릇 도는 잡되지 않아야 한다. 잡되면 용무가 많아지고,
多則擾(다즉요) 擾則憂(요즉우) 용무가 많아지면 어지러워지며, 어지러워지면 근심이 생기고,
憂而不救(우이불구) 근심이 생기면 남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잡다하지 않은 "단순은 궁극의 정교함"(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아인슈타인은 "무언가를 간단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그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단순함이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그 단순은 오랜 수련을 거쳐 도달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거의 완벽한 상태이다. 그러니까 단순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서툰 것도 아니다. 무용수들의 춤을 보면,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고된 훈련을 통해 최적의 몸 상태를 만든다. 그들의 움직임의 가장 큰 특징이 단순이다. 이들은 군더더기(장자는 '익다(益多)'라고 표현) 없는 최소한 움직임으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동작을 만들어 낸다. 나는 아르떼(ARTE)라는 방송으로 가끔 세계 최고 무용 공연을 넋 놓고 볼 때가 있다.
배철현 교수가 소개한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윌리엄 오컴에 의하면, 어떤 명제가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판가름하는 추론의 기준은 불필요한 가정의 제거라 보며, "필요 없이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라 말했다. 이 문장을 더 풀이 하면, 문제의 핵심을 모르는 사람은 복잡하게 설명합니다. 쓸데 없는 말들로 오히려 본질을 흐립니다.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피하라는 말이다.
인생이란 삶을 위한 최적의 상태인 단순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문명을 가져다 준 두 가지 요소를 배철현 교수는 도시와 문자로 삼는다. 도시는 사적인 이애가 상충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대화와 양보를 통해 공동체 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추상적인 공간이다. 문자는 이 추상적인 공간을 유기적으로 엮어주는 거룩한 끈이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은 문자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했는데,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알파벳을 완성했다.
호메로스의 천제성은 자신들에게 절실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창조적으로 변용 했다. 영어를 포함한 오늘날의 대부분의 유럽 문자들은 페니키아 알파벳을 수정한 그리스 알파벳의 후손이다. 알파벳은 26개의 문자로 인간의 거의 모든 생각을 표현 수 있는 단순함의 극치이다. 혁명이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이름을 바꾸는 용감한 행위이다. 혁명의 핵심은 꼭 필요한 몇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제거하는 단순함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복잡한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단순한 것에서 출발한다. 노자는 <<도덕경>> 제12장에서 오만 가지의 색깔, 오만 가지의 소리, 오만 가지의 맛은 사람을 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했다. 말을 달리면서 하는 사냥과 구하기 힘든 재물도 사람의 행동을 번잡하고, 광포하고, 방자하게 만든다. 재물이 많다고 삶이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을 비울 때 도에 가까워진다. 성인은 배를 위하되 눈을 위하지 않는다는 대목은 삶의 본질적 요소와 비본질적 요소를 구분하라는 의미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는 거피취차(去彼取此)도 같은 맥락이다. 버려야 할 저것은 많은 재물, 많은 음식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이고 취해야 할 것은 소박하고 단출한 생활, 즉 삶의 본질이다.
우리는 흔히 '연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초록'이라고 말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연두'는 ‘완두콩의 빛깔과 같이 연한 초록색'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연두는 완두 콩의 완두를 생각하고, 그 완두에서 초록을 생각한다. 초록은 풀의 푸른색을 직접적으로 연상하지만, 완두의 초록이 하나의 필터를 더 가진다. 초록이라고 해서 단 하나의 초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초록이 있다. 노랑에 가까운 초록이 있을 수 있고, 파랑에 가까운 초록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초록은 적색이나 주황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연두의 초록은 어떤 색에 가까울까?
연두의 저녁/박완호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 간밤 비 맞은 연두의 이마가 초록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한 연두가 연두를 낳는, 한 연두가 또 한 연두를 부르는 시간이다 너를 떠올리면 널 닮은 연두가 살랑대는, 널 부르면 네 목소리 닮은 연두가 술렁이는, 달아오른 햇살들을 피해 다니는 동안 너를 떠올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네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려올 무렵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거리의 나무들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채워지며, 수채화가 유화가 될 것이다. 숲의 아래 쪽은 진녹색, 중간은 초록, 위 쪽은 아직 연두로 짙고 얕은 '녹색의 향연'은 좀 더 계속될 것이다. 봄이 꼭대기를 쫓아가며 농담(濃淡, 진함과 묽음)의 붓질을 해댈 것이다. 드문드문 섞인 솔숲이 암록(暗綠, 어두운 초록색)일만큼 신록이 눈부실 것이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색이 변화하며 형형색색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군자삼변(君子三變)"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수양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 모두가 되고 싶어하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엄숙함, 따뜻함 그리고 논리력을 모두 갖춘 사람을 '삼변(三變)'이라고 했다. 그런 세 가지 다른 변화의 모습을 그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군자'라 한다 했다.
(1) 일변(一變)은 멀리서 바라보면 의젓하고 엄숙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망지엄연(望之儼然)’이라 표현한다. ‘멀리서 바라보면(望), 엄숙함(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 풀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며 의젓하기는 하지만 가까이 하기엔 다소 어려운 면이 있을 수 있다.
(2) 이변(二變)은 엄숙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 대화해 보면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것을 '즉지야온(卽地也溫)'이라한다. '멀리서 보면 엄숙한 사람인데 가까이 다가서서(卽) 보면 따뜻함(溫)이 느껴지는 사람의 모습이라 풀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겉은 엄숙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속은 따뜻한 사람이다.
(3) 삼변(三變)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정확한 논리가 서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청기언야려(聽其言也厲)'. 그 사람이 하는 말(其言)을 들어 보면(聽) 논리적인 모습(厲)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자는 비록 달변은 아닐지 모르지만 했던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다.
이를 종합하면, 군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외면의 엄숙함과 내면의 따뜻함에 논리적인 언행까지 더해져, 멀리서 보면 의젓한 모습, 가까이 대하면 대할수록 느껴지는 따뜻한 인간미,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행을 하는 군자, 최상의 사람, 선비, 보살인 것이다. 그것이 한 사람의 품격이다. 요즈음 말로 해서 리더는 온화하되 절대로 유약해서는 안 된다. 주저하고 결단치 못하는 리더는 전체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는 리더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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