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일부터는 '잔인한 4월'이 시작된다. 그냥 겨울 잠을 자고 싶다.

194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3월 31일)

 

악몽 같은 3월이 지나간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다. 지난 3월 9일부터, 세상을 외면하고 살고 있다. 뉴스를 보지 않는다. 올해의 봄은 다른 해보다 꽃 소식이 늦는 것 같다. 코로나는 정점이라 하면서, 우리들의 턱 밑까지 쳐들어 와 일상이 개판이다. 이젠 전염병인지 풍토병인지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아침 마다 원치 않는 <안전 안내 문자>라는 이름의 메시지로 오는 '오늘 확진자 수'로 겁을 준다. 사람들은 집 밖으로 안 나와, 다 음식을 배달해 먹는다. 무서워서 안 나오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안 나온다. 세상이 뒤틀렸다. 그로 인해 쌓이는 저 쓰레기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정권 교체기라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 대한 담론은 제로이다. 새로 맡은 정권은 자기들이 들어갈 새집 이사에만 매달리고, 아직도 전 정권의 흠만 잡는다. 그것도 치사하게 영부인의 옷 값 시비를 한다. 누워 침 뱉기 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거짓의 탈을 쓴 후안무치들이 판을 친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돈으로 매수한 듯'한 '기레기'들의 거짓 뉴스가, 그리고 자극적인 뉴스로 장사치처럼 자신의 기사를 팔아먹기에 혈안이 된 거지 같은 기사와 한 자리 혹시 얻을까 흑심을 품은 일부 어용 지식인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칼럼 등 역겹다. 그냥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는 "극즉반(極即反)"만 믿는다.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 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도 있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차이로, 다름으로 받아들이기 난 쉽지 않다. 난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고 기다릴 뿐이다.

내일부터는 '잔인한 4월'이 시작된다. 그냥 겨울 잠을 자고 싶다. 깨어나고 싶지 않다. 그냥 노자적 삶을 살면서, 다같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싶을 뿐이다. 특히 노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더러운' 세상에 그냥 빠져 나도 더럽게 살고 싶다. 마침 이번에 읽을 노자 <도덕경>> 제15장이 그런 이야기를 해준다.

유가(儒家)가 더러움에 대하여 결벽한 태도를 고집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노자적 인생관에 젖은 사람은 결벽보다는 진흙 속에서 오욕투성이의 삶의 방식을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유가가 음탕한 곳에 가지도 않고 고결한 자세를 취하는 데 반해. 노장(老壯)은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가기를 좋아하며, 유가가 남성적인 강함을 미덕으로 삼는 것에 반해, 노장은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찬미하고 어린이와도 같은 연약함을 동경하는 것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윤리적 규범으로 철갑을 두른 인생을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유가적 사람들과는 달리 노장은 인의(仁義)를 대도(大道)가 사라진 말엽의 촌스러운 가치라 보고, 인(仁)을 끊어 버리고, 의(義)를 내다 버리고, 오직 자연의 도를 따라 살라고 권유한다. 도올의 주장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이렇게 <인문 일기> 쓰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우리 각자 자연의 도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를 도에 따라 수행하면 되는 거다. 어떻게? 노자가 제15장에서 문학적으로 말해 준다.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微妙玄通(미묘현통),  深不可識(심불가식) ; 옛날부터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미묘하고 현통하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 그걸 알 길이 없지만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대강 형용하자면 

豫焉 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며 신중하고, 
猶兮 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사방의 이웃을 대하듯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고, 
儼兮 其若容(엄혜기약용(객)) : 얼굴에는 엄숙함이 묻어 있고, 
渙兮 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 : 흩어질 때는 녹으려 하는 얼음과 같고, 
敦兮 其若樸(돈혜기약박) : 통나무처럼 도탑고, 
曠兮 其若谷(광혜기약곡) : 계곡처럼 확 트이고, 
混兮 其若濁(혼혜기약탁) : 흙탕물처럼 탁하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탁한 것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하고,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누가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천천히 움직여서 온각 것을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새로운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

도를 인간사의 영역에서 잘 구현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인문적 지식을 탐구하는 인문학자가 아니라, 인문적 지식을 일상에서 구현하는 인문 운동가의 모습이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득도한 사람의 모습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도를 터득하고,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하다 죽고 싶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나를 '빈 배(虛舟)'로 살  생각이다.


사직서 쓰는 아침/전윤호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 먹히기 싫은 심정으로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도올은 제15장의 이 부분,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자기를 혼탁한 물로 만들어, 그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에 오래 머물었다. 나는 이 질문에 인문 운동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누가 그걸 할 수 있겠는가? 자기가 스스로 해야지 누가 시킨다고 되겠는가?

도올에 의하면, 깨끗하기는 쉽다. 그러나 진실로 나를 더럽히면서까지 그 주변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지고의 공력을 요구하는 것이라 보았다. 도올은 이런 말도 했다. "조선 왕조의 정치는 청류(淸流)의 오만으로 포용적인 가치기준을 세우지 못했고, 탁류(濁流)의 타락은 새로운 질서를 태동시키지 못했다." 오늘의 정치 현실에도 통찰을 주는 부분이다.

지금부터는 유가(儒家)적 사람들과는 달리 도가(道家)에서는 인의(仁義)를 대도(大道)가 사라진 말엽의 촌스러운 가치라 보고, 인(仁)을 끊어 버리고, 의(義)를 내다 버리고, 오직 자연의 도를 따라 살라고 권유했다는 말을 더 이어가 본다. 유가에서는 우환의식을 가슴에 새기고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의(義)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비겁한 자라고 질책한다.  반면 도가는 대환(大患)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을 귀하게 여기듯 하라고 가르치며, 또 나의 생명의 지속과 건강을 모든 가치 규범에 우선 순위에 둘 것을 가르친다.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부드럽고, 약하고, 소극적이고, 퇴행적이고, 때가 많이 낀 것처럼 보인다. 반면 유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국가권력이나 지배계급에게 환영 받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노자의 사람들은 국가 권력에 봉사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지배 계급의 익을 도모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근원적으로 문명의 진보에 기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유교적 가치관에 젖은 사람들의 눈에 노자적 인간들은 소극적이고 퇴행적이고, 야비하고, 겁약하고, 우아함을 결여한 잡초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자적 인간은 국가나 도덕 규범이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피어난다고 생각했다.

노자적 인간들은 문명이 인간의 삶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그것 이야말로 문명이나 문화의 가치를 결정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겁쟁이들처럼 겁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겁약한 삶에 철저하다는 것은 최상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유약(柔弱)이야말로 강강(剛强)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세를 함축한고 있다는 것을 노자적 인간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노자적 인간들은 인간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행복이나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해, 유교는 물론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린다. 잘 알다시피, 서양의 유화는 캔버스를 한 치의 여백도 없이 칭한다. 그러나 우리의 수묵화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한 여백 투성이다. "노자적 인간관은 현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정치, 경제적 세계로 부터 탈락된 사람들, 우월한 인간 그룹에 끼지 못한 열패자들, 지배자가 될 수 없는 피지배자들에게 안위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역사의 근원적 퇴락을 막는 건강한 주춧돌 역할을 하여 왔다" 도올은 강조하였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자기를 혼탁한 물로 만들어, 그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지만, 그 탁류에 자신도 몸을 담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혁명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의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깊은 통찰이다. 남 탓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삼고, 혐오와 분노에만 의지하느라 관용과 용서와 화해와 협력은 하지 않고, 공동체에 아귀다툼과 삿대질만 했던 나를 반성한다. 진흙 같은 현실에 뛰어 들어, 도를 실천해야 한다. 도를 체득한 사람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 제15장의 이야기는 내일로 미룬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